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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참



니코올~ 일어나. 깨우려는 의지가 있나 싶을 정도로 조곤조곤한 음성이다. 현관에 쌓여있는 택배 상자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옆에 신발을 벗어둔다. 만들어지다 만 옷가지를 피해 침대로 다가가면 깨 벗고 이불 뭉치를 끌어안은 방 주인이 있다. 알람은 끈질기게도 울리는데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는 양 평온하다. 의주는 망설이지 않고 맨 어깨를 흔든다.


“니콜, 8시 넘었어.”



놀란 듯 파득 몸을 떨며 의주의 얼굴을 한번, 베개 아래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내더니 쨍-하게 울리는 알람을 꺼버린다. 그러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려는걸 의주가 빼앗아 발 아래로 밀어버린다.



“야아 니콜 일어나.”



정시에 못 들어가면 과제 못 낸다고 제발 와서 깨워달라고 우는소리 할 땐 언제고 믿을 구석이 생기니 더 뭉개는 게 훤히 보인다.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고 다 먹혀들어 가는 목소리로 5분만, 5분만 애원하는 걸 듣던 의주의 시야에 속옷만 덜렁 입혀진 둥그런 엉덩이가 들어온다.



“의주 미쳤어??”



미친놈이야? 다른 발음은 분명히 조금씩 흘리는 거 같은데 욕은 유난히 또박또박 발음한다. 커다란 엉덩이마저 평온해 보이는 게 얄미워 꽉 쥐었더니 그제야 벌떡 몸을 일으킨다. 다 잠긴 목소리로 인상 팍 쓰고 미쳤어? 어쩌고 하는 얼굴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제법 무섭겠지만 의주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씻어. 나도 수업 가야돼. 의주 진짜 변태야, 미친놈이야! 짜증 섞인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화장실로 사라지고 그제야 의주는 어지러운 방안을 둘러보며 과제가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종이 가방과 가방을 신발장 근처에 뒀다. 그 사이 화장실 거울 앞에 선 니콜라스의 자다 일어난 부스스한 몰골이 어쩐지 벌겠다. 찰나였지만 엉덩이를 꽉 쥐던 감각이 선연했다.



니콜라스는 평소보다 10분이나 일찍 강의실에 도착해 며칠 밤을 공들인 과제를 무사히 제출했다. 천근만근 같던 눈꺼풀도 제법 가벼워지고 배도 고팠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자취방 근처에 있는 맛집은 지금 가면 대기가 없을 테지만 내키지 않았다. 오로지 니콜라스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엉덩이를 망설임 없이 주물럭거리던 손길만이 가득했다. 한 낮이 아닌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미쳤어 미쳤어…. 그와 동시에 입맛이 뚝 떨어진 니콜라스는 근처 카페로 들어가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절반 이상 비우고 테이블에 엎어졌다. 의주 왜 내 엉덩이를 주물렀지. 의미 없는 생각을 빙빙 돌려가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니콜라스는 잠시 잊고 있던 배고픔이 밀려와 몸을 일으켰다. 밥이나 먹을까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려는데, 방금까지도 니콜라스의 머릿속에 있던 당사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니콜 밥 먹었어?





복학 첫 학기임에도 시간을 착각해 수강 신청을 망한 의주와, 과 동기 도움 없이 혼자 수강 신청을 하다가 망한 니콜라스. 두 사람은 1년 전 교양수업 ’월드뮤직’에서 만났다. 시간표 짜는 걸 망한 의주의 다음 수업은 전력 질주해야 5분 컷인 예대 건물에서 하는 전공수업이었다. 그 사이의 텀은 고작 15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수업이 끝나면 항상 뭐 빠지도록 캠퍼스를 달렸다. 근 한 달 가까이 의주는 니콜라스의 존재조차 모르던 어느 날. 뒤에서 콕콕 저를 찌르는 느낌에 돌아본 뒷자리에서 지난주 잃어버렸던 대본집이 눈앞에 나타나는 기적을 만났다. 변,의주 씨? 대본집에 써놓은 이름을 보고 확인하듯 묻는 것에 의주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학생증 보여줄 수 있어요? 굉장히 또박또박 발음하는 것이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의주는 철두철미한 성격인가 싶어 지갑 깊숙이 넣어둔 신분증을 꺼내 확인 시켜주었다. 그제야 살짝 굳어 있던 표정이 약간 느슨히 풀리며 슬며시 웃는 얼굴이 된다. 이거 지난주에 떨어뜨리고 뛰어가는 거 봤어요. 그런데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어서 확인했어요. 어정쩡히 몸을 돌려 전하던 감사 인사는 교수님의 입실로 급하게 마무리되었다. 다음 수업만 없으면 커피라도 한잔 사고 싶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달려 나가야 하는 처지에 의주는 결국 프린트물 귀퉁이를 찢어 쪽지를 썼다.



[정말 감사합니다. 찾아주신 게 중요한 거라 보답하고 싶은데 제가 바로 다음 수업이 있어서요, 좋아하시는 음료 있으시면 다음 주에 한 잔 사다 드릴게요. 괜찮으세요?]



대화라도 좀 더 나눌 시간이 있으면 좋으련만, 상황도 여의치 않고 연락처를 묻거나 주는 건 부담스러울 것 같아 의주 딴에는 최선의 선택지를 골라 쪽지에 적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사각거리는 소리가 교수님의 말소리와 함께 섞여 들려왔다. 의주의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에 돌아보자, 조금 커다란 글씨로 쓰인 답장이 내밀어졌다.



[음료는 괜찮아요. 혹시 다른 부탁 들어줄 수 있어요?]



필담으로 오래 이어지지 못할 대화라고 생각했는지 디엠 달라는 문장 끝에 아이디가 쓰여있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약간은 어리둥절했지만, 의주는 과한 부탁이라면 정중히 거절해야지 마음먹고 잊기 전에 아이디를 검색해 팔로우했다. 니콜라스 왕. 대만 사람이구나. 화려한 프로필 아래에 쓰인 이름을 곱씹으며 의주는 그날 전공 수업을 마치고 니콜라스에게 연락했다. 안녕하세요, 저 월드뮤직 수업에서 뵀던… 정중히 시작하는 문장이 단정한 얼굴과 퍽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니콜라스는 의주의 디엠을 읽음과 동시에 팔로우하고 밋밋하게 꾸며진 피드를 모조리 훑었다. 흐릿하지만 조막만 한 머리와 길고 슬림한 몸매. 스타일은 몰라도 신체 스펙은 마음에 쏙 들었다. 첫 수업이 끝나고 급히 뛰어가던 뒷모습, 예대 흡연구역에서 우연히 본 웃는 동그랗고 뾰족한 얼굴, 출석 부를 때 대답하는 나긋한 목소리까지. 어떻게 말을 걸어볼까 매주 하던 고민이 강의실 입구에 떨어져 있던 대본집을 주워 든 순간 모조리 사라졌다.



저를 1년 차 유학생이라고 소개한 니콜라스는 몇 마디 주고받기가 무섭게 메시지가 능숙하지 않다고 만남을 제안했다. 강의실 말고 밖에서 만난 첫날 밥이나 한 끼 하고 헤어지겠거니 했지만, 통성명과 자기소개를 끝낸 둘은 동갑의 나이, 거꾸로 된 생일 부모님과 두 살 터울 누나가 있는 가족 구성원의 공통점과 공감대를 타고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첫인상에 오해를 많이 산다던 니콜라스는 대화 내내 수다스럽긴 했지만 부담스럽게 선을 넘지도 않았고, 웃음도 많았다. 둘은 다른 모양의 퍼즐이 만나 꼭 맞는 것처럼, 만날수록 부딪히는 것보단 오히려 잘 맞아 들어가는 관계였다. 겉보기엔 나쁠 거 없어 보였지만 니콜라스는 그냥 의주의 얼굴이, 외형이 저의 취향이었고 가까워지면 좋지 않을까. 대화나 한 번 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갔다가 의주가 저에게 점점 더 소중한 사람이 되어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난 다른 결의 마음 한 줌이 버거워졌다.





“의주 밥 왔어?”



도어락 문을 엶과 동시에 점심이 왔는지부터 확인한 니콜라스는 긍정의 대답 대신 작게 왁자한 동영상 소리에 조심스레 의주를 한 번 더 부른다. 과제물로 시험을 대체하며 며칠씩 몸 갈아 넣는 건 니콜라스와 다를 바 없는 의주가 손안에 핸드폰을 쥐고 잠들어있다. 안경도 벗지 않은 채 잠들어 이미 반의반쯤 우스꽝스럽게 밀려나 있다. 작게 웃은 니콜라스가 바보주주 안경 다 망가지겠네. 안경 허리를 조심스레 집어 빼낸다. 보통 때 같으면 니콜라스와는 다르게 느릿하게나마 눈을 뜰 의주가 미동도 없다. 가까이 가니 코골이까지 하고 있는 게 웃기고, 그렇게 피곤한 와중에도 저를 깨워주러 일찍 온 의주가 고마워 숨죽여 웃던 니콜라스는 요 며칠 새 해쓱해진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볼살이 좀 없어졌네, 눈 밑 새까매… 속으로 감상을 늘어놓다 꺼칠하게 튼 입술에서 시선을 멈췄다. 좋아하는 사람의 자는 얼굴을 몰래 들여다보는 거, 그러다 입술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상대가 눈을 뜨고, 눈이 마주치고 입을 맞추는 많이 클리셰적으로 앙큼하게 이어지던 상상은 초인종 소리와 함께 화다닥 달아난다. 의주가 눈을 뜨기 전 다행히도 몸을 자연스레 일으킨 니콜라스가 밖에 나가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의주가 눌린 머리칼을 매만지며 식탁 앞에 앉는다.



“언제 왔어?”

“방금, 의주 되게 잘 자더라?”

“어 완전 기절했네. 너무 피곤하다 진짜….”



의주는 말끝에 호흡처럼 하품이 따라붙고, 반쯤 졸음으로 감겨있는 눈을 하고도 성격 급한 니콜라스 대신 바스락거리며 포장을 열어 각자의 몫을 앞에 하나씩 둔다. 역할 분담처럼 니콜라스가 반찬 뚜껑을 열고 수저를 각자의 앞에 놓으면 비슷한 속도로 식사가 시작된다. 내일이면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니콜라스는 방학 동안 고대하던 대만에 간다. 작년엔 좀 바빴고, 적응도 빡쎄게 한다고 아예 안 갔으니까.



“의주 대만 놀러 올 수 있어?”



티 내지 않으려고 해도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다. 원래는 방학이 끝나기 전 대만에 가겠다고 계획했었지만, 방학 때 선배 단편작 조연출을 맡게 됐다.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 잠시 보류해 둔 상태였는데, 어제 나온 일정은 의주가 방학 중 2주도 자유롭게 보내지 못하게 할 일정이었다. 잠시간 망설이던 의주가 말을 꺼낸다.



”가고 싶은데 안될 거 같네.“

”그래? 어쩔 수 없지… 나중에 겨울에 와. 의주 땀쟁이라서 여름에 대만 오면 땀 엄청 흘릴걸? 옷 다 젖어.“

”야 나 그 정도는… 그러려나…?“

”엉, 완전. 근데 오면 재밌는 거, 맛있는 거 소개해 주려고 했는데 의주 나 같은 가이드를 놓쳐서 아쉽게 됐네~“



놀리는 투로 말하지만 정말 아쉬운 건 대만에 가는 당사자다. 밥 먹는 수저질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말소리가 줄어들지만, 의주는 그것까지는 의식하지 못한다. 졸면서 밥이나 먹네. 바보주주. 니콜라스는 아닌 척했지만 내심 표정을 숨기기 어려워 말을 아꼈다.



“2학기 마치면 바로 갈까?”

“응?”

“겨울에 놀러 오라며.”



니콜라스는 올겨울, 추워도 의주와 함께 눈을 맞고 싶어 가족들을 보고 싶은 마음 참고 대만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때 또 의주 바쁜거 아냐…?”

“일 생기기 전에 그냥 가버리면 되지.”



장담할 수 없는 미래를 덜컥 약속해 버리는 건 의주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거기에 촬영 다니고, 수업 쫓아가고, 과제 하다 보면 제 하루를 통째로 빼앗기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극히 제한적인 환경이 그런 성미를 더욱 견고히 만들었다. 그랬는데 의주는 2학기 일정 나오면 시험 끝나는 날 맞춰서 미리 표를 끊자고 약속까지 했다. 머릿속으로는 불투명한 미래임이 분명했지만, 의주는 본인의 의지대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기대에 부풀었던 니콜라스의 마음이 저 아래까지 떨어졌다가 트램펄린 타고 팍 튀어 올랐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다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가로막혀 서운한 티도 내지 못하고 웃어넘겨야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두근거리는 마음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친구의 경계는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의주의 사이클을 한 번쯤 벗어나게 해도 괜찮은 정도의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들떴다.





방학이 시작되고 니콜라스는 대만으로 의주는 촬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와중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붙어 다녀서 그랬는지 텀은 길었지만,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누가 먼저 뭘 하느냐 묻는 연락만은 아니고, 처음엔 의주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너 고구마 좋아해서 이거 좋아할 거 같아. 그러다 풍광이 멋진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어떤 날은 불쑥 이거 너 닮았어 의주. 우스꽝스러운 사진에는 나도 너 닮은 거 찍었어 니콜. 눈을 가늘게 뜬 시커먼 고양이 인형을 넙데데하게 늘린 사진을 보냈다. 의주 죽을래? 퍽 다정한 연락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친구 사이에 퐁당퐁당 주고 받기에는 조금 달짝지근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일반적인 우정의 결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이 의주에게 오고 말았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숨 가쁘게 달려왔던 의주의 첫 조연출 작품도 끝을 맺었다. 뒤풀이가 있었고 술을 좀 했지만 그저 조금 알딸딸한 정도였다. 친척들이 놀러 와 농구를 했다는 니콜라스의 메시지를 본 의주는 답장을 하는 대신 페이스타임을 걸었다. 신호가 조금 오래가는 듯싶어 끊으려고 할 때 니콜라스의 땀에 젖은 말간 얼굴이 화면 가득 들어찼다. 머리를 이리저리 매만지다 아예 모자를 써버린 니콜라스는 놀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와하하 의주 뭐야??



“뭐긴 뭐야. 나 없이 노니까 재밌어?”

- 에, 주주 술 마셨어?

“조금, 아 근데 너 아직 대답 안 했어. 나 없이 노니까 재밌냐구…”

- 아 뭐야! 유치해!



결국 의주도 웃어버린다. 뭐가 유치해 니가 나한테 치던 장난이잖아. 니콜라스와 농구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의주가 과 동기들과 농구를 한 날 니콜라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주 내가 농구하자는 건 다 거절하고, 나랑은 하기 싫었던 거네? 나랑 노는 거는 재미없어? 쉬지 않고 쏘아붙이던 날을 기억한다. 물론 웃으면서 반쯤은 장난이었지만 반쯤은 진심이 섞여 있다는 걸 니콜라스와 지내며 의주는 어느 정도 알았기 때문에 그날 온 몸을 던져 니콜라스와 농구를 뛰고 기절 잠을 잤다. 드문드문 타이밍이 맞을 때 텀 길게 오가던 메시지 대신 마주보고 대화하니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오간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의주는 오랜만에 아주 즐겁게 웃었다. 그건 니콜라스도 마찬가지였을까. 의주는 불쑥 궁금해진다. 왜 이런게 궁금하지, 의문은 이후의 일이다.



“니콜.”

- 응 왜? 아 잠깐만!



온통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가 오간다. 제대로 중국어를 하는 걸 들어본 게 손에 꼽는 것 같다. 모국어를 말할 때의 니콜라스 말투나 톤은 저랬지… 멍하니 말소리를 듣던 중, 곧 화면 가득 니콜라스가 들어찬다. 친척들인데 얼른 들어오라고… 나 의주 전화 와서 잠깐 나왔거든. 아, 우리 얼마나 통화했지? 한 시간 반? 아 들어가야겠네. 나도 들어가야겠다. 응, 그래. 다음에 봐. 니콜. 화면에 손을 흔들던 의주는 화면이 새카맣게 꺼지고 찾아온 고요에 허전한 기분이 든다. 알딸딸하던 술기운이 달아난 지 오래다. 의주 잘 자! 😴😴 도착한 메시지를 본 의주는 불쑥 니콜라스가 보고 싶어졌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 붙여넣기에는 다소 그리움이 짙었다.



의주는 오로지 니콜라스를 생각하다 그날 밤을 꼴딱 새웠다. 아무 이유 없이 니콜라스에게 더 느슨해졌던 기준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니콜라스에게도 행복한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의주는 침대에 뉘인 몸이 푹 꺼진 듯이 피곤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 니콜라스에게로 이어진 감정의 끄트머리가 우정의 껍데기에 쌓인 애정이라는 걸 깨달은 의주는 심장이 쿵쿵 뛰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질끈 감았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잠을 몰아 잔 의주는 눈을 뜨자마자 모레 한국에 온다는 니콜라스의 메시지에 쉽사리 답장할 수 없었다. 자고 일어난 말짱한 정신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밤 마주한 감정의 진실이 현실이라는 것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의주, 나 모레 한국 들어가!]

[저녁에 뭐해? 나 선물 사왔는데~]



그날 밤 통화 이후, 의주는 니콜라스의 연락에도 묵묵부답이다. 촬영 다 끝나서 뒤풀이했다고 했는데 아직 일이 남았나.... 답장 없는 의주가 약간 서운했지만, 니콜라스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한국에 들어왔다는 연락까지 했는데! 선물도 사 왔는데! 아무 말 없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냐? 니콜라스는 짐도 채 다 풀지 못한 채 불퉁한 표정으로 자취방에 누워 핸드폰을 노려보다 베개 옆으로 휙 던져버렸다. 한편으로는 제가 그날 통화에서 의주에게 마음을 들킬만하게 행동한게 있을까? 복기해보지만 걸리는 건 없다. 그리고 오히려 주주가 더 반가워했는데?! 의주에 관한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짝사랑은 너무 불리해. 니콜라스는 눈을 감았다. 꼬리를 무는 생각을 차단하는 그의 방식 중 하나였다.



니콜라스가 한국에 왔다. 오자마자 만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연락이 친한 사이에 못 할 일은 아니었지만 제 감정을 인지한 의주는 괜스레 긴장이 됐다. 일이 있다는 핑계로 약속을 미루거나 최대한 만나는 걸 피할 수는 있겠지만, 영영 피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더구나 그런 문제들을 차치하고 니콜라스가 보고 싶다는 감정이 가장 우선이었다. 일단 얼굴을 보자. 니콜라스를 만나자. 의주는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거의 끊길 때쯤 푹 잠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건너온다. 웅 의주 어디야?



둘은 자주 가던 식당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푹푹 찌는 저녁이지만 그럼에도 번화가의 거리는 사람들이 붐비고 시끌벅적하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니콜라스가 먼저 들어가 있겠다고 할까 싶어 휴대폰을 들었을 때 근거리에서 뛰어오는 의주를 발견한다. 반가움에 활짝 웃으며 손을 든 니콜라스는 저를 발견한 의주의 속도가 늦어질 거라고 생각하며 손을 흔들었다. 주주! 저도 모르게 이름과 몰래 섞어 부르던 별명이 튀어나와 이름을 정정하려고 할 때, 중심이 휘청일 정도로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무게가 니콜라스를 끌어안았다. 놀란 니콜라스는 한 손을 번쩍 든 채로 눈을 껌뻑인다. 거친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보고 싶었다는 말과 뜨끈한 체온 그리고 맞닿은 가슴으로 느껴지는 쿵쿵거리는 박동까지 니콜라스는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응, 의주 나도 보고 싶었어.

서로의 진심은 숨긴 채였지만, 사랑의 작대기가 선명히 서로에게 가 닿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