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프터 양> 차용
벌써 세 번째 재부팅 시도다.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을 끌어모아 버튼을 누르자 작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가도 뚝 멎었다. 충전 어댑터와 전원 버튼을 번갈아 보며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한 이샹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 화면을 천천히 두들기다 내려놓을 때까지도 의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고. 이샹은 누나에게 간단히 의주의 상태를 보고한 뒤, 반듯이 누워있는 의주의 코끝을 검지 끝으로 조심스레 건드렸다. 의주, 잠을 왜 이렇게 오래 자. 꼭 죽은 듯이 잠든 의주의 감은 눈꺼풀 위로 이샹이 후, 하고 작게 입바람을 불었다.
사실 죽음이라는 단어도, 잠이라는 단어도 의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지금 의주의 상태는 다른 말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여전히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얼굴을 바라보다 코끝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동그란 볼을 콕콕 찔러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의주의 가슴팍 위로 머리를 기대고 엎드렸다. 좀 일어나 봐, 의주. 작게 중얼대는 목소리 뒤로는 의주의 대답 대신 이샹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뒤따랐다.
시크릿주주
Secret JUJU
의주는 누나가 3년 전쯤 구매한 안드로이드였다.
무슨 영화였는지, 드라마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한국에서 만들었다는 그것에 푹 빠진 누나는 갑자기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어 했다. 시작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책이었지만. 금세 유치원생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게 된 누나는 언어 공부용 어플로 넘어갔다가, 그 다음엔 화상 통화로 넘어가며 한국어 공부에 몰두했다.
내가 보기엔 드라마에서 나오는 사람들만큼 한국어를 잘하는 것 같은데. 누나는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결국 한국인 친구를, 정확히는 남자 친구를 사귀고자 했다. 자세히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시도 끝에 누나는 한국인 남자 친구를 사귀는 대신 ‘변태 새끼’, ‘씨발놈’, ‘개새끼' 등의 각종 한국어 욕에 더 능통해졌다.
그 뒤로 한동안 잠잠한가 싶었는데. 현실에 존재하는 남자 대신 안드로이드 쪽으로 시선을 돌린 누나는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더 늘렸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모은 돈도 누나가 원하는 스펙의 신형 안드로이드를 구매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던 탓에 누나는 결국 밤낮으로 중고 사이트를 뒤졌다.
누나의 기준은 딱 두 개였다. 한국어 지원이 되는 모델일 것, 그리고 외관이 준수할 것.
의주는 중고치고는 꽤나 비싼 값이었다. 하지만 어설프게 한국어 지원이 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한국에서 맞춤 제작했던 안드로이드였다는 점. 그리고 누나가 원하는 얼굴상은 아니었지만, 키가 크고 얼굴이 작은 배우상이라는 점에서 누나의 약 3개월 치의 알바비와 맞바꾸어졌다. 그 가격에 이걸 사왔다고? 미심쩍은 눈빛으로 한마디하자 누나는 내 돈으로 내가 산 거니까 참견하지 말라며 일갈했다. 어디 가서 이 가격으로 이런 모델은 맞춰서 만들지도 못한다는 말도 함께 덧붙였고.
둘이 살던 집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180센티미터가 넘는 짐 덩어리를 들였으면서도 누나는 당당했다. 네 방에 들일 일도 없고, 거실은 공용 공간이니까 상관없지 않냐면서. 사실 집세는 누나가 더 내고 있었으니까 가타부타 따질 마음도 없었지만… 아무튼. 나는 안드로이드라는 게 불편했다.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처럼 행동하는 로봇이라니. 영 꺼림직했다. 어쩌면 사실 조금 무섭기도 했던 것 같다.
더군다나 의주는 비싼 값치곤 안 되는 것도 좀 많은 편이었다. 한국에서 만들어 온 모델이라 여기선 수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맞춤 제작이라 이름을 바꾸거나 언어 설정을 바꾸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누나는 의주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그냥 그러려니 했다. 누나는 스스로 지어뒀던 한국 이름을 의주에게 입력했고. 그 뒤로는 둘만 아는 언어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때까지도 사실 의주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네 방에 들일 일 없다는 말처럼 누나는 의주를 거실과 본인의 방에서만 사용했다. 보통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거실 한 구석 전용 충전기에 의주를 세워 둔 채 충전하는 식이었고. 눈을 감은 채로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땐 조금 무서웠지만, 그것도 금방 적응됐다. 가끔은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누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다른 자세는 자리를 많이 차지하기도 하고, 어차피 로봇이니까 별 상관없지 않냐면서.
사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로봇이 서 있는 자세로 좀 오래 있는다고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충전 중에는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인 데다가, 내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그날은, 조금 특이한 날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누나는 본인이 사용하지 않을 때엔 의주를 잘 켜놓지 않았다. 이미 2년 남짓 사용한 모델이라 배터리 효율이 좋지도 않았고, 안드로이드를 꺼려하는 나를 배려하는 차원이기도 했다. 최대한 나와 의주를 일대일로 마주치지 않게 하겠다는 말은 대체로 잘 지켜지는 편이었지만.
“어, 안녕하세요.”
들리는 목소리에 어깨까지 들썩여가며 놀랐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의주도 덩달아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의주의 언어는 한국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라곤 고작 누나가 지었다는 누나의 한국 이름뿐이었다. 창밖을 가리키고 곧게 편 검지와 중지를 모아 입가에 가져다 대는 제스처로 이해했다.
안드로이드를 구매하겠다는 목적으로 잠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는 모양이었다. 으으, 담배 냄새 싫은데.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의주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작게 웃어 보이는 얼굴이 착해보였다. 기계한테 착하다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안을 돌아다니는 내내, 거실에 앉아 있는 의주를 마주칠 때마다 꾸벅이며 인사를 건네면 의주도 웃으며 마주 인사해왔다. 그렇게 의미 없는 인사만 열댓 번을 넘어갈 때쯤. 결국 나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볼까 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술만 달싹이길 한참. 잠시간의 어색한 대치 중 금세 담배를 다 피우고 들어온 누나는 이제서야 일어났냐며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고 잔소리를 퍼부어댔고.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나는 씻는다는 핑계로 화장실로 도망쳤다.
사람도 아닌데, 왜인지 거실에 있을 낯선 이가 신경 쓰여 노래도 틀지 못하고 영 개운치 않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그새 의주는 선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오늘의 대화 연습은 금방 끝난 모양이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다 대수롭지 않은 척, 누나에게 물었다.
“그, 걔… 계속 세워놔도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누나는 그게 무슨 이상한 질문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기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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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은 확인해 봤냐는 누나의 연락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답신했다. 매뉴얼에 쓰여있는 재부팅 방법대로 벌써 세 번도 넘게 해봤는데 잘 안된다고.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 왔다. 그렇게 길지 않은 통화에서도 얻은 수확은 딱히 없었다. 어차피 의주를 만든 회사는 한국에 있고, 그마저도 이젠 다른 회사와의 경쟁에서 밀려나 거의 망해가고 있다고 했다. 우선 문의라도 넣어보라는 누나의 말에 곧장 그렇게 했다.
망해가고 있다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검색한 회사 사이트의 문의 방식은 오로지 메일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요즘 세상에 이메일로 문의를 받는다고. 겨우 찾아낸 메일 주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문의를 넣었지만 답신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냥 그것만을 기다리자니 어쩐지 초조해져서. 이샹은 결국 주변 안드로이드를 판매하는 대리점을 찾았다.
하지만 근처 어떤 회사의 어떤 지점을 가도 돌아오는 답변은 비슷했다. 다른 회사의 안드로이드와 완벽히 호환되는 부품은 없을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불법 개조나 다름없어 정식적인 루트로 의주를 고칠 수는 없을 거라고. 사실 기적처럼 명쾌한 해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절망적인 상황에 막막해졌다.
“손님, 잠시만요.”
“네?”
“사실 이런 거 소개해드리면 안 되는데….”
조악한 종이 쪼가리에 휘갈겨 적힌 주소와 연락처를 보니 불법이라는 게 영 빈말은 아닌 듯했다. 한 치 망설임 없이 악필로 적힌 주소를 겨우 검색해 냈다. 불법이라도 상관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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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간 곳은 생각보다 번듯한 건물이었다. 으슥한 골목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너무 평범한 가정집 느낌. 게다가 문을 열어준 앳된 얼굴은 불법적인 일 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어딘가 어수룩한 느낌과 조금 어눌한 듯한 말투. 의주보다 훨씬 동그랗고, 말랑말랑한 볼을 가진 남자는 알고 보니 외국인이라고 했다.
“직접 보는 게 더 정확하긴 해요. 지금 기계 상태가 아예 꺼져있는 건가요?”
“네. 안 켜져요. 매뉴얼대로 해봐도 안 돼서….”
“음…. 그럼 가져오시기는 어렵겠네요.”
“…아, 네. 걔 키가 조금 커서, 데려오기는….”
미묘하게 대화의 포인트가 어긋나는 기분. 기계를 고치는 곳에 와놓고는 의주를 기계 취급하는 데에 반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의주를 고치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므로. 이샹은 잠자코 남자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직접 보는 게 좋겠다는 남자의 말에 연락처를 교환한 후 집에 오는 길. 눈을 뜨자마자 정신없이 돌아다녔더니 배가 고팠다. 간단히 요깃거리라도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 이것저것 고르며 구경하다 도시락 하나를 고르고, 마실 것을 고르러 시선을 돌린 곳에서 익숙한 음료수를 발견했다.
배 사진이 프린팅되어있고, 가운데에 크게 빨간색 동그라미가 그려진 음료수. 한국에서 유명한 음료수였다. 이젠 이샹에게도 익숙한 맛이었고. 콜라 캔과 음료수 페트병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던 이샹이 결국 하얀 페트병을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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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거실에 눈을 감은 채로 서 있는 의주의 인영을 보고도 놀라지 않게 됐을 즈음, 누나는 대뜸 한국행을 선언했다. 아르바이트를 겸하며 꾸준히 이력서를 난사하던 참에 한국에 있는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그거 사기 아니야? 놀리고 싶은 마음 반, 걱정되는 마음 반에 건넨 말에 누나는 눈을 좀 흘기다 사뭇 진지하게 답했다. 잘 알아봤고, 생각보다 규모도 큰 회사고, 하여튼 사기는 아닌 것 같다고.
“언제 가는데? 당장 내일은 아닐 거 아냐.”
“이번 달 안에는 가야 돼. 가서 집도 알아봐야 하고….”
2주 남짓 남은 기간이었다. 생각보다 촉박한 시간에도 누나는 별로 긴장되거나 불안한 기색은 아니었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 옆에서 덩달아 하는 것 없이 바쁘게 보내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마지막으로 캐리어 무게를 점검하는 누나 옆에서 다른 캐리어 지퍼를 잠그던 이샹의 눈에 의주가 들어왔다. 거실 한 구석에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는 의주가.
“누나.”
“왜?”
“쟤는?”
쟤는 어떻게 할 거야. 묻는 이샹의 손끝엔 의주가 자리하고 있었고. 으음…. 잠시 고민하던 누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냥 저대로 두든가, 네가 쓰던가, 그것도 아니면 중고로 다시 팔든가. 네 마음대로 하라고. 가벼운 대답에 왜인지 심기가 불편해졌다. 내 것도 아닌 걸 내 마음대로 하라니. 핸드폰 하나를 정리한다고 해도 그것보단 복잡할 텐데. 이유도 알 수 없게 꼬인 심사에 스스로도 당황스러워 이샹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의주는 누나가 떠난 뒤로도 한참을 그 상태로 방치되었다. 충전 어댑터에 연결된 채, 눈을 감고 바른 자세로 서 있는 상태 그대로. 의주를 다시 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한국에서 어느 정도 적응을 끝낸 누나가 영상통화를 걸어왔을 때였다. 여기에도 의주만큼 키가 큰 남자는 별로 없다고, 혹시 의주는 어떻게 했는지, 벌써 정리했는지를 물었다.
아직 그대로 있다는 말에 반색한 누나는 오랜만에 의주를 보고 싶어 했다. 인사라도 나누고 싶으니 한 번 켜보라는 말에 이샹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켜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전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애먼 머리 쪽에서 헤매는 이샹에게 누나는 한심하다는 듯 전원 버튼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전원 버튼은 왼쪽 손목의 안쪽. 으레 맥박을 잴 때 손가락 두 개를 얹어보는 곳을 잠시간 누르고 있으면 곧 눈을 뜬다고 했다.
영 내키지 않았지만 의주의 손목 안쪽을 감아쥐었다. 의주의 손목은 생각했던 것보다 말랑하고, 조금 건조하고, 따뜻했다. 정말 사람의 피부 같았다. 그런 감상에 젖어 있기도 잠시. 몇 초간만 누르고 있어도 켜진다는 누나의 말과는 다르게 의주는 여전히,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여기가 아니야?”
“맞는데?”
“안 켜지는데.”
“그럴 리가. 손목 안에 대충 건드리면 켜져. 다시 해 봐.”
몇 차례 시도 끝에 나는 그제야 충전 어댑터에 연결된 케이블이 뽑혀 있는 것을 찾아냈다. 그리고 누나에게 조금 구박을 받았고. 확인하자마자 케이블을 연결했지만 며칠이나 방전되어 있던 의주는 바로 켜지지 않았다. 조금 아쉬워하던 누나는 한국에 있는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니 당분간은 의주를 팔지 말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언제는 내 마음대로 하라더니. 사실 의주를 어떻게 할지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잘된 일 같았다. 누나가 다시 전화를 걸기 전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내심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미뤄두었던 기간도 금방 다가왔다. 며칠 지나지 않아 누나는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며칠 내내 충전을 마친 의주는 누나의 말대로 손목 안쪽을 몇 번 더듬자 금세 눈을 떴다.
어색한 손길로 의주에게 제 핸드폰을 쥐여주고, 누나와 대화를 나누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의주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럽게 통화를 이어받았다. 알 수 없는 언어로 나누는 둘의 대화가 새삼스레 낯설었다. 그리 길지 않은 통화를 마친 의주는 다시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
“그냥, 뭐. 한국 재밌다고. 좋다고.”
“그렇구나….”
“아, 그리고.”
“응?”
“이제 의주 정리해도 돼.”
“뭐?”
놀란 이샹과 달리, 누나는 태연해 보였다. 어차피 자신은 향후 몇 년간은 다시 대만에 돌아올 일이 없을 것 같고, 너는 그동안 줄곧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의주를 불편해하지 않았냐며. 방금 간단히 작별 인사도 마쳤으니 이젠 정말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누나의 말이 꼭 아까 전 둘만 나누던 낯선 언어처럼 멀게만 들렸다. 멍하니 듣던 이샹이 누나의 말을 다급하게 끊었다. 잠깐, 잠깐만.
“쟤, 우리가 하는 말 알아듣는 거 아냐?”
“아마 전부 이해하긴 어려울걸. 한국어 말고 다른 언어는 업데이트를 거의 안 해놔서.”
“아….”
애초에 학습용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가 아닌 데다가, 이미 몇 개월 정도 사용한 중고품이었으니 기계의 과부하를 막기 위해선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차라리 그게 다행인 듯싶었다. 아무리 기계라도 앞에서 대놓고 정리라느니,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좀, 뭐랄까…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경악한 이샹의 표정을 살핀 누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다는 듯, 이샹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괜찮아.”
“뭐가?”
“어차피 의주는 기계잖아.”
“…….”
“원래 그렇게 쓰이라고 만들어진 거야. 의주도 다 알고 있어.”
원래라는 말이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여전히 질색하는 표정의 이샹을 달래듯 누나가 말을 덧붙였다. 정리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네 마음대로 해.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웃는 누나의 얼굴 뒤로 의주의 얼굴이 보였다. 동그란 눈을 착하게 뜬 채로 제 얼굴을 살피는 표정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이샹은 여전히 의주가 어려웠다.
“저….”
이어질 제 말을 기다리는 의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그랗고 착한 눈. 시선을 조금 내리면 보이는 오똑한 코와 매끄러운 입술. 웃는 것처럼 끝이 말려 올라간 입꼬리. 그런 것들을 찬찬히 훑어보다 이샹이 겨우 입을 떼었다.
“…전원, 어떻게 꺼요? 끄고 싶어요.”
“아, 여기를 누르면 돼요.”
간단한 말은 알아듣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이샹의 모국어로 건넨 말에도 의주는 제 왼쪽 손목을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처음 전원을 켰던 그 자리를 다른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무어라 말하는 한국어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제스처나 눈치로 알아챘다. 아까 눌렀던 곳을 다시 건드리면 되는 거겠지. 그 자리에서 바로 전원을 끄고 옮길 수는 없을 것 같아 충전 어댑터가 있는 곳을 공손히 두 손으로 가리키자 의주는 조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몸을 옮겨 자리에 똑바로 선 의주가 다시금 제 왼쪽 손목을 이샹에게 내밀었다. 괜스레 제 팔을 문지르던 이샹이 의주의 손목 안쪽에 조심스레 손가락을 대었다. 살짝 힘을 주어 누르자 곧 의주가 눈을 감았다. 그런 의주의 앞에서 이샹이 다시 제 손목 안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톡, 톡, 톡. 규칙적으로 혈관이 튀는 게 생경하게 느껴졌다. 의주의 손목에선 느낄 수 없던 감각이. 톡, 톡, 톡.
/
의주가 있는 방으로 남자를 안내하자, 의주를 처음 본 남자는 신기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침대에 눕혀두셨네요? 또 기계를 사람 취급하는 제가 이상하게 보이는 걸까. 지레짐작한 이샹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기요.”
“네?”
“저한테는 그래도 좀, 친한… 친구였거든요.”
“아.”
남자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
“주로 세워두시는 분들이 많은데, 어차피 제대로 보려면 눕혀야 해서.”
“아….”
“그래서 보기 편하게 미리 눕혀두신 줄 알았어요.”
“…….”
“이상하게 생각 안 해요.”
말을 마친 남자가 눈을 데굴 굴리다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한눈에 봐도 무거워 보이는 백팩 지퍼를 열고 이것저것 꺼내 드는 모습이 신기했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머쓱하게 웃는 얼굴이 어려 보였다. 혹시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앳된 얼굴만큼 어린 나이였다. 나는 그맘때쯤 뭐했더라…. 가물가물 기억을 더듬어 생각하다 보니 딱 그때쯤이었다. 의주와 처음 만난 것이.
누워 있는 의주의 몸에 기계를 갖다 대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꼭 병원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저 마음 졸이며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보호자의 마음. 그런 건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부산스레 움직이는 남자와 가만히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의주를 번갈아 보던 이샹이 조용히 방을 나섰다.
어쩐지 초조한 마음 반, 기대하는 마음 반으로 거실에서 다리를 떨며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방 안에서 나온 남자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무어라 길게 설명하는 말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는 단어들뿐이라. 설명하는 본인도 답답했는지, 번역기를 사용해도 되겠냐며 양해를 구하는 남자에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인이에요?”
“아, 네. 어! 일본어 할 줄 아세요?”
번역기에 대고 말하는 언어는 이샹도 할 줄 아는 언어였다. 일본인이었구나. 언젠가 사귀었던 애인이 일본인이었던 덕에 어느 정도는 알아듣고 말할 수 있었다. 일본어 할 줄 알아요. 편하게 설명해 줘도 돼요. 남자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우선 좋은 소식이 있어요.”
“뭔데요?”
“큰 결함이나 고장은 없어요.”
“아…. 근데 그럼 왜….”
“여기서부터는 조금 안 좋은 소식인데….”
제 말처럼 단순한 기계 노후화 때문인 거면, 부품만 바꾸면 되거든요. 그런데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회사 부품은 시중에서 구하기가 어려워요. 한국에서라면 몰라도 여기에서는 더… 어려울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 구한다 해도 정품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요.
“그러면, 한국에 가서 구해 온다고 하면요?”
“음….”
“고칠 수 있어요? 아무리 비싸도, 어떻게든 구해 온다고 하면.”
“그게….”
사실 기계 자체가 오래된 거라…. 사용한 지 얼마나 됐다고 했죠? 아, 삼 년…. 중고로 사 온 거라 처음 출고 일자는 아예 모르시는 거고요…. 잠시 골몰하던 남자가 단호하게 입을 뗐다.
“그러면 더 어려워요. 몸체가 못 버틸 거예요.”
“…….”
“원하신다면 도와드릴 수는 있는데…….”
“…….”
“저라면 그렇게 안 해요. 차라리….”
“차라리?”
음, 아직 제대로 전부 뜯어본 건 아니지만요, 일단 제가 봤을 때 내부는 멀쩡해요. 그러니까, 안에 있는 소프트웨어까지 완전히 망가진 상태가 아니라면. 저라면 우선 메모리부터 백업할 거예요. 사실 지금도 불안정한 상태라 장담할 수 없긴 한데요…. 그래도 백업해 둬야 다른 기기에 이식하든지, 아니면 나중에라도 메모리 파일을 열어보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다른 기기’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찌푸려지는 이샹의 표정을 알아챈 남자가 다급히 말을 더했다.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진 마시고요….”
“…….”
“법이 바뀌어서, 아예 똑같이 만드는 게 불법도 아니고요.”
“…….”
“기술도 좋아져서 티도 안 나요.”
“…….”
“그래도…. 역시 고민되시죠.”
이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생각해 보셔도 되는데요. 어쨌든 메모리 백업은 추천드려요. 그리고, 하실 거면 최대한 빨리 결정하시는 게 좋고요…. 어쨌든 기본 백업은 아마 다른 회사 일반 서비스센터에서도 가능할 테니까요.
남자가 돌아간 뒤. 여전히 누워 있는 의주를 살폈다. 그냥 가만히 자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은데. 어린아이 같은 동그란 얼굴에 노화라는 말은 영 어울리지 않았다. 괜스레 볼을 한 번 쿡 찔렀다. 손끝에 닿는 건조한 볼의 촉감은, 여전히 말랑하기만 했다.
/
의주를 다시 켰던 것은 반쯤은 충동이었다. 애인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심심했고, 마침 누나가 SNS에 올린 외국의 풍경과 알 수 없는 문자들을 보고 문득 그것들을 배우고 싶어졌다. 이미 할 줄 아는 언어는 두어 개가 넘는 데다가, 번역기만 있으면 못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없는 세상인데도 그랬다. 어떤 기계의 과정을 거친 정제된 언어보다는 거칠고 서툴더라도 직접적인 소통을 더 선호하는 이샹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을 즐겼다. 비단 언어뿐이 아니더라도, 새로 알게 되는 것이 늘어날수록 넓은 세상을 더 선명히 보게 되는 감각이 좋았다.
다만 기계를 다루는 게 능숙하지 않은 탓에 의주를 켜는 것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켜고 끄는 법은 알았지만. 아무래도 기계와 통성명부터 하는 게 민망했던 탓에 미리 어플로 기본적인 설정을 하려던 게 화근이었다.
한국회사에서 만든 안드로이드라지만 어플에서도 이름과 나이, 성별을 입력하는 란에 지원되는 언어가 한국어 하나뿐이라니. 아직 한글엔 영 까막눈인 이샹은 당황스러웠다. 겨우 번역기를 돌려가며 차근차근 정보를 입력하다 이름 칸에서 망설였다. 뭐라고 쓰지. 한국 이름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잠시 고민하다 영어 이름을 적었다. 니콜라스. 영어로는 쉽게 쓸 수 있는 이름을 한글 네 글자로 쓰는 데에는 또 많은 시간이 들었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 자판을 뒤져가며 쓰다 오타가 났다. 그걸 수정하려다가 버튼을 잘못 누른 탓에 결국 두 글자만 넣은 채로 입력되고 말았다.
‘니콜라스’가 아닌 ‘니콜’로 입력된 이름을 다시 입력할까 하다 말았다. 어디서 들은 바로는 한국인들의 이름은 대부분 성 한 글자에 이름 두 글자라는데. 정 이상하면 어플이 아닌 의주와 대화하면서 수정하면 될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다시 처음부터 입력하는 게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고.
우여곡절 끝에 설정을 끝마친 이샹이 의주의 전원을 켰다. 잠시간의 기다림 끝에 눈을 뜬 의주가 이샹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 니콜.”
꼭 오래된 친구를 본 것처럼 친근한 목소리로. 안드로이드와 사용자의 관계를 설정하는 단계에서 별 생각 없이 제일 무난해 보이는 친구 관계를 고른 게 원인인 듯싶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색한 사이였던 의주와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한 게 무색할 만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의주는 늘 그랬던 것 같았다. 맨 처음 인사를 건넨 날도, 누나가 떠난 뒤 영상 통화로 대화를 나눴던 날도. 약간은 맹한 듯, 착하고 동그란 얼굴. 마주 인사가 돌아오지 않자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는 의주에게 이샹이 급히 대답을 건넸다.
“안녕, 의주. 만나서 반가워. 앞으로 잘 부탁해.”
의주를 켜기 전, 혼자 연습했던 간단한 인사말이었다. 긴장한 탓에 입이 제멋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발음이 제대로 된 걸까. 의주는 알아들었을까. 잠시간 긴장한 얼굴로 의주의 반응을 살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의주는 곧 웃으며 상냥한 대답을 돌려주었고.
“응, 니콜. 나도 잘 부탁해.”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네는 목소리엔 꼭 마법이라도 걸려 있었던 걸까. 잘 부탁한다는 그 흔하디 흔한 인사말을 들은 그 순간부터. 이샹은 그냥 의주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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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누나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타지 생활에 지쳐있는 누나의 하소연을 얼마간 들어주다, 문득 의주를 보여주고 싶어졌다. 누나, 잠깐만. 기다려 봐. 의주를 본 누나는 반가움과 놀라움이 섞인 얼굴을 했다. 언제 둘이 그렇게 친해졌냐며 신기해하다가도, 이내 대수롭지 않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잘 지내라고 말했고. 우리가 애냐며 싸울 일이 어딨냐고 투덜대는 이샹의 옆에서 의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싸워요. 니콜 착해요.
“그런데, 충전기는? 원래 거실에 있었잖아.”
“아, 그거….”
눈썰미는 또 왜 이렇게 좋은 건지. 이샹이 의주를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거실에 있던 충전기는 방 안으로 옮겨졌다. 불이 꺼진 거실에 의주를 혼자 세워두기 싫었다. 제가 쓰던 침대를 의주에게 내어주고, 누나의 방에서 지내기 시작한 것도 이제 슬슬 적응되어가던 참이었다. 처음엔 커다란 충전 기계를 침대 근처에 설치하느라 고생을 좀 했지만. 그래도 그러고 싶었다.
“니콜, 나는 누울 필요가 없는데….”
“의주! 안 도와줄 거면 비키라니까.”
곤란한 표정으로 이샹을 만류하던 의주는 결국 낑낑대며 기계를 옮기는 이샹을 도왔다. 누울 필요도, 잠을 잘 필요도 없는 의주를 침대에 눕히고 싶었던 건 순전히 이샹의 욕심이었지만. 푹신한 침대에 의주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자 눈을 끔뻑이는 표정이 웃겼다. 푸핫. 누워 있는 자신을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내려다보던 이샹이 웃음을 터뜨리자 의주가 볼멘소리를 했다. 거 봐, 웃기잖아. 이상하잖아.
“아니, 안 이상한데? 귀여워서 웃은 거야.”
“거짓말하지 말고. 아, 나 그냥 서 있을게.”
“왜! 나 이거 엄청 힘들게 옮긴 거야.”
“같이 옮겼잖아.”
“솔직히 푹신하긴 하지? 이불 좋은 거야, 이거.”
입꼬리를 올리고 씩 웃는 이샹의 얼굴을 바라보던 의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되게 푹신하고, 포근하고…. 포근? 포근은 뭐야. 아, 포근이 뭐냐면….
의주와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심심하지 않았다. 매일 새로 배우는 표현도 재미있었다. 누나가 재밌게 봤다던 드라마도, 영화도. 의주와 함께 봤다. 가 본 적 없는 한국의 풍경이나 분위기 따위가 궁금해지면 의주에게 물었다. 한국은 진짜 저래? 의주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사실 자기는 한국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실사용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거라. 실제로 겪어보진 못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같이 가면 재밌겠다.”
“응, 재밌을 것 같아.”
“의주가 나 데리고 다녀줘야 돼. 나 아직 한국말 잘 못하니까.”
“잘하는데? 니콜. 한국말 엄청 늘었어. 처음보다.”
의주의 말처럼, 이샹의 한국어 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처음엔 간단한 인사말도 배우가 대사를 외우듯 통으로 외웠던 이샹은 이제 한국어로 농담도 하고, 노래 가사의 장난스러운 비유법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궁금한 건 바로바로 물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샹에게 의주는 그때그때 필요한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친구이자 선생님이었으므로. 이샹의 한국어 실력이 단기간에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의주, 한국에서 제일 많이 쓰는 애칭이 ‘자기’야?”
“응. 서로 나이 차이나 사귄 기간에 따라서 달라지긴 하는데.”
“귀엽다.”
“뭐가? 자기라는 호칭이 귀여워?”
“어. 한국어로 자기는 나라는 뜻도 있잖아.”
“응. 맞아.”
“근데 사랑하는 사람한테 자기라고 부르기도 하는 게 뭔가, 귀여워.”
인기 있고 유명한 한국 작품들은 거의 로맨스였던 탓에 자연히 생긴 궁금증이었다. 이샹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의주가 되물었다.
“그럼 여기서 제일 많이 쓰는 애칭은 뭐야?”
“오, 의주가 나한테 질문을 하기도 하네.”
“방금 검색해봤는데, 발음이 어려워보여서.”
바오베이? 라오궁? 이렇게 읽는 거 맞나? 고개를 갸웃하던 의주의 표정을 본 이샹이 웃음을 터뜨렸다. 의주! 너무 진지해.
“그런 건 좀…. 뭐랄까.”
“잘 안 써?”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조금 느끼한데?”
“아아.”
자기가 뱉어놓고선 질색하는 표정이다. 그런 의주를 보며 한참을 큰 소리로 웃던 이샹이 눈물을 훔쳐 닦는 시늉을 했고. 민망한 듯 살짝 빨개진 얼굴로 헛기침을 하는 의주에게 이샹이 설명을 더했다.
“다른 거 알려줄게. 그거 말고.”
“또 놀릴 거지.”
“아니! 진짜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의주를 보며 이샹이 입을 열었다.
“주주.”
“주주?”
“이렇게 이름 끝에를 두 번 부르는 것도 애칭이야.”
“그러면, 니콜은… 콜콜?”
다시금 이샹의 웃음이 터졌다. 아니! 내 이름 니콜 말고 다른 거 또 있어.
“다른 이름?”
“응. 왕이샹.”
왕이샤앙. 성조를 붙인 이샹의 이름을 따라 작게 되뇌인 의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샹샹?”
“어, 응. 맞아. 그렇게 하면 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과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사랑스러운 애칭을 부르는 의주를 보니 괜히 명치께가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서. 이샹은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주주! 나만 부를래. 주주는 그냥 계속 니콜이라고 불러줘. 의주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니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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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한국의 음식들에도 관심이 생겼다. 혼자 다니던 편의점도 의주와 함께 가면 재밌는 일 투성이였다. 평소에 혼자 나올 일이 없는 의주를 굳이 끌고 나와서 혼자 구경하라고 등을 떠밀어 놓고, 라면 코너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의주를 불렀다. 주주! 키가 큰 의주의 정수리가 매대 사이에서 헤매는 게 다 보였다. 나 여기 있어. 라면 쪽에. 웃음을 참으며 다시금 부르자 금세 나타난 의주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 있었다. 왜 불렀어?
“이거, 얼마나 매워?”
“많이.”
“아, 그런 거 말고. 이거랑 비교하면?”
“잠깐만. 음….”
의주가 라면 봉지 두 개를 받아 들고 가볍게 시선으로 훑었다.
“이게 훨씬 더 맵대.”
“의주도 먹어본 적 없지.”
“응. 나는 뭘 먹을 필요가 없으니까….”
“같이 먹어볼래? 먹을 수는 있잖아.”
“그렇긴 한데…. 니콜, 매운 거 잘 먹어?”
“당연하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매운 라면을 사와 끓여서 나눠 먹는 내내 눈물 콧물을 쏟느라 정신이 쏙 빠졌다. 의주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라면을 씹으며 휴지를 뽑아 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고. 넌 안 매워? 묻자 의주는 그저 고개를 으쓱했다.
“아까 한입 먹었을 때 통각 센서가 꺼졌어.”
“와, 반칙이지 그건!”
“내가 끈 거 아냐…. 자동으로 꺼진 건데. 다시 켤까?”
잠시 망설이던 이샹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키지 마. 그럼 너도 아프잖아. 의주는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마저 라면을 먹었다. 이샹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어쩐지 속은 기분에 발끈했다가도, 의주가 자기랑 똑같은 아픔을 느끼는 건 싫었다. 어차피 의주는 기계일 뿐인데도.
“아이스크림 없어?”
“어제 그게 마지막이었나 봐. 아까 사 올걸.”
“바보 주주! 나가기 전에 말해줬어야지~”
“너가 오늘 아이스크림 먹을지 말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오….”
억울한 표정의 의주를 놀리며 장난스레 투덜대던 이샹이 몸을 일으켰다. 나가자! 가서 사오자. 그 말엔 또 순순히 몸을 일으켜 졸졸 따라오는 의주가 귀여웠다. 아까도 들렀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나온 김에 물도 더 사 가려 음료 냉장고를 들여다보다 눈에 띄는 음료수가 있었다.
“주주. 이것도 한국 거 아냐?”
“어? 어. 맞아. 한국 음료수.”
“뭐라고 써있는 거지…. 밑에는 영어 아니야?”
“아, 이거는 영어가 아니고. 배. 필기체 같은 폰트네.”
“배?”
“응. 과일이야.”
“그렇구나. 주주도 이거 먹어본 적 없지?”
“응. 먹어본 적 없어. 검색해 보니까 유명한가 봐.”
“먹어보자! 궁금해.”
정작 사 온 아이스크림은 냉동실에 대충 넣어둔 채로 의주와 사이좋게 음료수를 나눠 마셨다. 처음 마셔본 배 음료수는 달았다. 심심한 듯, 은은하게 감도는 배의 향긋한 냄새와 달콤한 맛. 맛있다, 주주. 그치? 이샹이 묻자 의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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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샹은 의주의 전원을 잘 끄지 않았다. 끄는 대신, 대기 모드로 돌려놓는 것을 택했다. 매번 켜고 끄는 것이 번거롭기도 했고. 사실 전원을 끄면 정말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는 의주의 모습이 싫기도 했다. 그런 이샹에게 의주는 자동으로 작동 시간을 설정할 수 있는 타이머 기능을 알려주기도 했지만. 며칠 그 기능을 사용해 본 이샹에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의 생활 패턴은 불규칙한데, 의주는 규칙적으로 시간에 맞춰 전원이 켜진 채로 혼자 깨어 있는 게 싫다고 했다.
“그러면 의주 심심하잖아.”
안드로이드인 의주는 심심함도, 외로움도 느끼지 못했지만 이샹은 늘 의주를 꼭 사람처럼 챙기려 들었다. 대기 모드 중에는 눈을 감고 있는 의주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고. 처음엔 그런 과정을 어색해하던 의주도 나중엔 눈을 감은 채로 이샹에게 너도 잘 자라는 인사를 돌려줄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완전히 전원을 끄지 않은 상태인 의주는 눈을 감아도 이샹의 작은 기척까지도 알아챌 수 있었기에 방 안에 누워 있다가도 이샹이 일어나 집 안을 돌아다닐 때쯤이면 자연스레 몸을 일으켜 활동을 재개했다.
“왜 안 자, 주주.”
“그냥, 니콜 안 자는 거 같길래.”
“나 때문에 깼어?”
“알잖아, 니콜. 나는 안 자는 거.”
“그렇긴 하지만….”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엔 의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이 안 와? 재워 줄까? 고개를 끄덕이면 의주는 제 이부자리 옆으로 이샹을 이끌었다. 원래 자던 데서 자면 더 잠이 잘 올 수도 있잖아. 그리 넓지 않은 침대에 끼어 누운 채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울적했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의주, 손바닥이 축축해.”
제 어깻죽지를 규칙적으로 두들기던 의주의 손바닥에 금세 습기가 찼다. 아, 미안. 의주가 급히 손을 무르고 제 옷에 닦아내는 걸 보던 이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싫은 게 아니고. 그냥 신기해서.
도대체 어떻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의주는 땀이 많은 편이었다. 밖에서 같이 걸을 때도 조금 걷다 보면 곧 이마나 목덜미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는 게 다 보였다. 그럴 때마다 덥냐고 물으면 의주는 고개를 저었다. 더위나 추위를 느낄 수는 있지만 사람만큼 예민하게 느낄 수는 없다고. 심지어 온도를 감지하는 센서도 마음대로 끄고 켤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땀이 많이 나.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축축한 이마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대답한 의주가 머쓱하게 웃었다.
이샹은 종종 의주가 사실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상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사람의 모습을 따 만들어진 기계기에 그렇게 설계된 탓도 있고, 이샹과 함께 보낸 시간 동안 이샹의 스타일을 학습한 것이겠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의주는 이샹에게 가장 좋은 친구, 선생님을 넘어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아, 내가 그 맛 먹고 싶었는데.”
“아니…. 먼저 고르라며.”
아이스크림 두 가지 맛을 내밀고 먼저 고르라고 하면 한참을 고민하다 고르는 것도, 사실 그 맛은 내가 먹고 싶었던 맛이라고 하면 당황하다가 억울해하는 것도. 딱딱한 기계나 로봇같은 것이랑은 영 어울리지가 않아서. 작은 목소리가 커지는 순간이나, 흥분한 듯 빨라지는 말투 같은 것. 그러니까, 꼭 정말 사람같은 모습들. 그런 것들이 보고 싶어서 놀리면 놀리는 대로 버튼을 누른 듯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의주의 반응들. 그런 모습을 보면 어쩐지 귀엽기도, 재미있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때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도 나랑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운지. 나랑 있으면 너도 나만큼 재밌는지.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너도 나를 좋아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알고 싶은 만큼,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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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이면 그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다. 의주를 본 사람. 내가 의주를 눕혀놔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사람. 하루 남짓한 시간의 고민 끝에 이샹은 다시 그 남자의 연락처를 찾았다. 빠른 시일 내에 결정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 놓은 건 본인이면서, 생각보다 빨리 답신이 온 것에 놀란 눈치였다. 다시 방문한 남자는 어쩐지 조금 비장한 표정이었고. 정말 이런 중요한 일을 저에게 맡겨도 되겠냐는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 사람이 아니라면 맡기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수리하듯 센터에 맡기는 것이 꺼려졌다.
“오래 걸릴까요?”
“아, 아뇨. 한…. 한 두세 시간? 안에는 끝나요.”
“아, 네….”
“저번에 봤던 사양이랑 매뉴얼 보니까, 용량이 큰 모델은 아니라서요.”
안에서 메모리만 뽑는 거라, 외관에는 아무 변화 없을 거예요. 조심해서 잘할게요. 걱정 마세요. 꼭 수술을 앞둔 의사가 보호자를 안심시키듯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린다는, 으레 보호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같은 것도 겨우 건넸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정말 채 두 시간이 되지 않는 시간 안에 작업을 마친 남자는 작은 메모리칩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남자가 조심스레 건넨 것을 쥐어보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네모난 메모리칩은 가벼웠고. 이 알량한 무게 안에 의주의 메모리가 들어있다는 것이 잘 실감 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내부 손상은 없는 상태라, 의주 안에 남아 있는 데이터를 전부 추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 기본적인 설정이나 입력값, 감정 모듈 같은 것은 멀쩡하다고. 다만 용량이 크지 않은 안드로이드였던 탓에 아마 유실된 기록도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샹이 다급히 되물었다. 유실이요?
“유실이요? 그럼, 언제 기억부터 없는 거예요? 많이 없어졌어요?”
“아, 아뇨. 이거는, 어느 시점부터 통째로 없어지는 게 아니고요.”
기기 자체에서 선별한 메모리를 우선적으로 남기는 거라서요. 뭐가 남아 있고 뭐가 없어졌을지는 몰라요. 용량이나 기간 같은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업계에서는 아직 연구 중이라고 하는데, 글쎄요…. 그냥, 사람 기억 같은 거죠.
“좋았든, 나빴든.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잖아요.”
“…….”
“안드로이드들 나름의 기준이 있을 텐데. 그건 아직 저희도 잘 몰라요.”
남자는 설명을 마저 했다. 별다른 리더기가 없어도, 그냥 일반 노트북이나 컴퓨터에 연결해서 언제든 열어볼 수 있고. 원래라면 압축이 풀리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이 정도의 용량이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라고.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떤 정신으로 남자를 배웅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열어보고 싶었지만 동시에 끝없이 미뤄두고 싶기도 했다. 의주가 누워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누워 있는 의주의 위로 가지런히 덮인 이불이 보였다. 제가 덮어주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양새로. 아마도 아까 의주에게서 메모리를 추출하고 난 뒤, 남자가 덮어준 것 같았다. 엉성한 듯 가지런히, 조심스레 접혀 있는 이불의 위쪽을 매만지다 이불을 들추고 그 옆에 몸을 뉘었다. 불편한 자세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선은, 조금 쉬고 싶었다.
/
잠깐 눈을 붙이는 동안엔 꿈을 꿨다.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던 이유는 눈을 뜬 의주가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니콜, 여기서 뭐 해. 안 좁아?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말하는 의주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조금 더 꾸고 싶어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몸을 뒤척일 때마다 닿아오는 의주의 뻣뻣한 감촉과 건조한 살갗,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온도가 자꾸만 잠을 깨웠다. 내 옆에 누워 있는 의주는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조금 와닿는 듯했다.
지금이 몇 시지. 잠도 깰 겸, 몸을 일으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페트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으려는데 며칠 전 사 온 음료수 병이 눈에 보였다. 의주와 함께 마셨던 배 음료수. 식탁엔 아까 받았던 메모리칩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이샹은 잠시 망설이다 노트북을 찾았다.
남자의 말처럼 연결은 어렵지 않았다. 잠시간 로딩을 기다리니 곧 폴더들이 떴다. 비디오 폴더를 선택하자 수많은 썸네일들이 보였고. 습관처럼 스크롤을 내리다 눈에 들어오는 사진에서 손짓을 멈췄다. 제 팔에 있는 흉터가 클로즈업 된 사진을 클릭하자 영상이 재생되었다.
화면에 가득 찬 것은 내 얼굴이었다. 자주 입던 익숙한 검은색 민소매를 입고, 거실에 앉아 의주와 대화하는 나의 모습. 기분이 이상했다. 거울로 보는 내 모습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내 모습은 약간 낯설기도, 어쩐지 부끄럽기도 해서. 잠시 영상을 멈췄다가 다시 재생하자 의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니콜.”
“응.”
“혹시 그거…. 아파?”
민소매를 입은 탓에 드러난 맨 팔뚝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나를 보다 의주가 건넸던 조심스러운 질문. 흉터를 매만지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고. 아니, 안 아파. 옛날에 다쳤던 거라. 고개를 끄덕이던 의주가 다시 물었다.
“어쩌다 다쳤는지 물어봐도 돼?”
“그냥 어릴 때 친구들하고 놀다가, 그….”
“…….”
“Sharp? 뭐라고 하지, 날카로운 거. 삐죽하다?”
“아. 뾰족한 거?”
“뾰족한 거. 맞아.”
“아팠겠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안 아파. 만져볼래? 내민 팔을 잠시 내려다보던 의주가 잡아 쥐었다. 드러난 살갗에 곧 의주의 손끝이 닿는다. 팔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흔을 조심스레 매만지는 손길. 조용조용 말하는 의주의 목소리.
“신기해. 엄청 아파 보이는데, 지금은 괜찮다는 게.”
“피 진짜 많이 났었어. 의주는 다쳐본 적 없지?”
고개를 끄덕이는 의주의 얼굴엔 어쩐지 부러움 비슷한 게 서려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이샹은 부러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주주. 안 다치고 안 아픈 게 제일 좋은 거야.”
“음. 맞지.”
“그래야 내 옆에 오래 있을 수 있지.”
“니콜도. 다치지 마. 아프지도 말고.”
그렇게 말하는 의주의 목소리와 함께, 화면엔 당황한 듯한 이샹의 얼굴이 비쳤다. 내가 저런 표정을 지었구나. 다치지도, 아프지도 말라는 말이 꼭 오래 함께 하자는 말 같았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인 듯 다정하게 건네는 말이 기뻤다. 의주는 말을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흉터를 어루만지고 있었고. 의주의 손끝이 닿는 자리마다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기분에 팔을 비틀었다.
“주주, 간지러워!”
“아, 미안. 미안.”
하나도 간지럽지 않았지만. 그때는 그런 핑계라도 필요했다. 간지럽다며 웃는 내 얼굴과, 머쓱한 목소리로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의주의 작은 목소리를 끝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자연스럽게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그리 크지 않은 용량이라던 남자의 말처럼 영상의 개수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고. 이건 뭐지? 꼭 건물 안 같은데, 흔들린 앵글이 썸네일인 영상을 재생하자 곧 무슨 날인지 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의주의 시선.
“니콜, 이 건물은 계단이 빠르다니까.”
“그럼 주주는 계단으로 갈래? 누가 먼저 가는지 내기하자.”
“내가 이기면 뭐 해줄 건데?”
“몰라. 의주 원하는 거 있어? 안마해 드릴까?”
“됐어…. 또 장난치려고 그러지.”
“아니거든? 나 완전 진지해.”
“니콜, 이상해. 평소에는 제일 빠른 길만 찾아달라고 하면서.”
“그래도 같이 탈 거지?”
뒤돌아 의주를 마주 보고 웃는 내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찬다. 의주가 고개를 끄덕였던 탓에 앵글이 엉망으로 움직이며 영상이 끝났다. 의주의 영상을 보는 건 생각만큼 슬프거나 힘들지 않았다. 흡사 예전에 유행했다던 브이로그를 보는 기분도 들었고. 꼭 어제 같이 생생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문득 누나의 기억도 저장되어 있는지 궁금했다. 누나뿐만 아니라 의주를 처음 만들었다던 그 사람에 대한 기억도. 폴더를 찾아봤지만 이름뿐인 폴더엔 이렇다고 할 영상이나 사진 대신 간단한 정보들이 적힌 텍스트 파일만이 남아 있었다. 시간이 오래 지난 탓일까. 의주가 선택해 남긴 메모리 속엔 온통 저의 모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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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밤이었다. 아니, 새벽인가. 한참 동안 화면을 들여다 본 탓에 뻑뻑해진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영상이 멈춘 까만 화면엔 제 얼굴만이 비쳤고. 이샹은 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언젠가 망설이지 말고 그냥 물어볼 걸 그랬지. 하지만 물어보지 않았어도, 대답을 듣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계에게 마음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비웃거나 손가락질 할 것이 분명하다고 해도. 나만큼은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의주의 기억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전부 생생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의주의 안에는 내가 있기 때문에.
나조차도 몰랐던 스스로의 사소한 버릇이나 습관, 취향 같은 것들이. 그러니까, 간단하게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더 자세하게는 내가 무엇을 보고 웃는지, 어떤 상황에서 슬퍼하는지. 화가 났을 땐 어떤 표정을 짓는지, 놀랐을 땐 무슨 말을 하는지. 주주라고 부를 때 동그랗게 모아지던 입술이, 의주를 바라보며 웃을 때 올라가던 광대가. 농담을 하기 전에 바뀌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나란히 걸으며 손이 스치면 빨개지던 귓바퀴가.
전부 의주의 기억 안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마 의주는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의주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또 어떤 질문을 하고 싶었는지. 이제서야, 나 또한 의주를 알 수 있었다. 모두가 비웃을지라도, 그럴 리 없다고 해도. 서로만은 분명히 느꼈던, 느낄 수 있는 이 감정의 이름은 우리만의 비밀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오직, 의주와 나만이 아는 비밀로.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