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불락

나리





사람은 대개 좋아하는 것들로 스스로를 설명한다. 즐겨 먹는 음식과, 자주 듣는 노래. 철마다 꺼내 입는 옷의 색깔. 질리도록 돌려 본 영화와 잠들기 전 습관처럼 떠올리는 얼굴. 누군가는 단것을 좋아하기도. 볕이 내리쬐는 날을 즐기기도. 여름보다 겨울을 기다리기도. 때때로 허황된 무언가를 온 힘 다해 사랑하기도 한다.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살아갈 의지를 다질 수 있는 존재. 조금은 하잘것없는 기호들이 모이고 모여 비로소 한 사람을 이룬다.



그렇다면 호오를 모두 잃은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종말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병은 사람을 단숨에 죽이지 않았다. 사지를 썩게 만들지도 않았으며, 이성을 잃고서 타인의 살점을 물어뜯게 만들지도 않았다. 가장 좋아하던 것부터 하나씩 앗아가는 질병은 야금야금 인류를 멸망시켰다. 지구에게는 인간이 바이러스라던 누군가의 말을 곱씹어 본다면, 바이러스의 생명력은 끈질기고도 진득하기만 했다. 꾸역대며 살아내는 삶이 지독하게 많았다.


감염된 인간은 선호를 느끼지 못한다. 수백 번 들은 노래는 그저 낯설게만 느껴지고, 죽을 만큼 좋아하던 얼굴을 보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고요해진다. 사랑하던 것과 관련된 추억을 차츰 잊어버린다. 좋고 싫음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선호와 기억을 잃어버린 채 공허하게 비어버린 사람들. 껍데기만 남은 인간은 천천히 죽는다. 호불호가 사라진 마음은 살아도 죽어도 그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텅 빈 속을 견디지 못해서일까. 수개월 내에 피부가 안으로 말려 들어가 생을 마감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아무리 물을 들이붓고 수액을 꽂아도 소용없었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에서 시작된 수축은 팔과 다리의 힘줄을 타고 번졌다. 종국에는 척추마저 안쪽으로 굽혀 놓았다. 감염자는 제 몸을 스스로 끌어안듯 바싹 말라 죽었다. 치료제는 없다. 병의 진행을 조금이나마 늦추는 억제제는 존재했으나, 지워진 취향과 감정은 주사를 아무리 꽂아 넣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빗물에 섞여 내린 오염원이 인간의 뇌를 갉아먹는 방식을 밝혀내기도 전에 많은 생명이 죽어 나간 탓에 연구에는 도저히 진전이 없었다. 비가 내린 지역에서 환자가 무더기로 발생했으며 빗물에 오래 노출된 사람일수록 병세는 더욱 빠르게 진행됐다. 한강을 잇는 다리가 주기적으로 무너진 탓에 차로 이동할 수 있는 경로는 자꾸만 줄어들었다. 산성을 머금은 비가 일 년 넘게 갈라진 콘크리트 틈을 파먹은 결과였다. 빗물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철근은 녹슬었고, 교각은 제 무게를 버티지 못했다.


누군가는 드디어 신이 노한 것이라고 했다. 성큼 다가온 심판의 날이란 명목으로 눈알을 번뜩이는 사이비가 판을 쳤다. 죽고 사는 문제를 장사로 삼아 돈을 쓸어모으는 종자들이 있는 반면, 미신을 믿지 않는 이들은 우주에서 날아온 균이 구름에 스며 비로 내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펼쳐진 가설 중 그 어느 것도 명확한 해답이 되지 못했다.


‘정동 소실증’. 기이한 병에 붙은 것 치고는 거창한 이름이었다. 허울뿐인 이름을 기억하는 국민은 드물었다. 공식적인 명칭과는 별개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것을 백지병이라 불렀다. 취향을 잃고, 추억에 얽힌 감정을 잃고, 끝내는 제 이름까지 잃은 인간의 머릿속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처럼 변한다고 해서.


변의주에게는 다소 억울한 이름이었다.

애초부터 변의주는 유난스러운 선호를 모르는 인간이다.





필사불락

변의주 니콜라스






양잿물 같은 비가 내린 지 일 년 하고도 삼 개월째. 멸망 직전까지도 절차와 형식을 사랑하는 대한민국. 생수 한 병을 추가로 타려면 합당한 사유를 기재해야 했으며, 오염지 외부 출입을 희망하는 자는 출발 사흘 전까지 신청서를 제출해야 했다. 당장 내일 대피소 천장이 무너져도 빼곡한 오늘 자 근무 일지를 작성해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더라는 것이다. 다가오는 종말에도 행정은 필요하다는 게 윗선의 입장이었다.


구닥다리 행정권 덕분에 변의주 직장은 꾸준히 철밥통이었다. 세상이 죄다 망해가는데도 공무원 타이틀 달고 출근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발전기 상태를 확인하는 일, 전날 들어온 배급품 수량을 맞추는 일과, 오염도 수치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방호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는 일. 죽은 이의 집에서는 먹을 만한 음식을 가져오고, 말단 연구소에서는 해열제와 붕대를 챙겨 도로 한복판에 늘어진 시체를 피해 낡은 승합차를 몰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그새 먼지가 쌓인 바닥을 닦았다. 씻을 물이 남아 있으면 씻는다. 없으면 대충 잔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갔다.


종말의 전이나 후나 변의주가 굴리는 삶의 꼬락서니는 얼추 비슷했다. 달라진 출근길과 주기를 잃어버린 월급. 사라진 연차와 휴가를 제외하고서는 단지 평범한 나날들. 변의주는 주어진 일을 특별히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인생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했다. 선호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기대에는 필연적으로 실망이 뒤따른다. 요구하지 않았던 바람으로 실망감을 안기는 일은 피곤했다. 대충 먹을 만한 것과 입을 만한 것. 가라면 갔고 남으라면 남았다. 일종의 프로그램처럼 당장 코앞에 놓인 명령을 따랐다. 깊이 생각할 필요 없는 단순한 인생이란 본디 그렇다. 선택지가 적은 삶은 편하다.


출처 모를 질병의 창궐에 인류는 과학의 한계에 직면했다. 그렇다 할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세상은 여전히 주먹구구식으로 흘러갔다. 언제나 똑같은 질문들에 시시한 대답을 늘어놓는 아침의 연속. 변의주를 구성하는 무던한 성정은 질병의 초기 증상과 놀랍도록 흡사했기에 쓸데없는 오해를 줘 받는 날도 적잖았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

“딱히 없어....”

“다시.”

“콩...?”

“주주.”



딱딱한 접이식 의자에 걸터앉은 의주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앞당겨진 출근 시간 때문에 온 얼굴 위로 피곤함이 덕지덕지 들러붙었다. 맞은편에 앉은 니콜라스가 청색 문진표를 내려다보며 볼펜 끝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톡. 톡. 톡. 일정하게 이어지는 소리가 안 그래도 멀쩡치 않은 신경을 벅벅 긁어댔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변의주는 탑차에서 몇 개 꽁쳐온 콩 통조림을 꽤나 즐겨 먹었다. 쓰레기가 많이 나오지 않고, 통조림 치곤 씹는 맛이 좋아서. 다른 것과 곁들여 먹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도.



“대충 대답하지 말고.”

“내가 뭘.”

“너 규동 좋아하잖아. 가끔 특식으로 나오는 그거.”

“아닌데.”

“거짓말. 맨날 두 그릇은 비우면서.”

“그건 내가 밥을 못 먹어서....”



니콜라스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매일같이 사람들 붙잡아놓고 취향을 취조하다 보니 이제는 아주 수사관이 따로 없었다. 의주가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짤막하게 하품했다. 밤새 동쪽 창고에 물이 새는 바람에 잠을 두 시간도 채 자지 못했다. 고작 물줄기 하나 틀어막느라 진을 다 뺐다. 멸망할 거면 하루빨리 시원하게 멸망할 것이지. 어째선지 세상은 도저히 인간을 곱게 죽이는 법이 없고 끝까지 누수와 곰팡이, 만성 수면 부족 따위로 괴롭혀댔다.



“됐어. 다음, 제일 좋아하는 노래.”

“없어.”

“으응, 틀렸어.”

“취향인데 틀린 게 어딨어?”



니콜라스가 입술을 비죽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길 때면 늘 저렇게 삐친 티를 낸다. 꼭 미운 다섯 살처럼 굴었다. 아침부터 새침한 상판떼기 덕분에 골머리가 찡했다. 의주를 오래 알고 지낸 주변인들은 변의주의 취향이 불분명하다고 믿었다. 명확하지 않은 취향을 어거지로 만들어낼 생각조차 않는 인간상. 모두가 변의주에게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고집불통 니콜라스를 제외하고서는.



“내가 차에서 틀어주는 거 따라 부르잖아.”

“그거야......!“



누적된 피로가 겹쳐 언성이 높아진다. 니콜라스의 한쪽 눈썹이 까딱였다. 니콜라스가 왜 이럴까. 오늘따라 유난히 태도가 귀찮았다. 한 마디를 지지 않고 따박따박.



“뭐.”

“... 네가 맨날 똑같은 노래만 틀어대니까.”

“그게 좋아하는 거지.”

“세뇌당한 거야.”



아침부터 씻고 나온 건지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듬성듬성 내려앉아 있었다. 배급받은 회색 작업복은 제멋대로 걷어 올린 채 목에는 이 시국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은색 목걸이를 걸었다. 옷 핏이 못생겼다며 한껏 불퉁거리던 얼굴을 기억한다. 니콜라스의 고집은 꺾이지 않는다. 사람 꼴 다 비슷해진 곳에서 혼자만 개성 있게 굴겠다는 독특한 심보. 어딜 가든 니콜라스는 눈에 띄었다. 그런 니콜라스를 바라보던 의주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향수 뿌렸어?”

“조금.”

“여기 밀폐 공간이야.”



니콜라스가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종종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방안에 굴러다니는 향수를 뿌리는 게 니콜라스만의 취미라는 걸 알고 있다. 태초부터 니콜라스는 독창성을 입고 태어난 존재. 코끝을 야트막하게 간지럽히는 향은 꼭 니콜라스를 닮았고.



“너한테서 홀애비 냄새 나니까 중화하려고.”

“향수 뿌리지 말고 한 번 더 씻어.”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머리 언제 감았어?”

“그저께....”



아아. 싫다, 진짜. 니콜라스가 진심으로 질색하며 의자를 뒤로 물렸다. 과장되게 코를 틀어막는 꼴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터진다. 탁자 아래로 발을 뻗어 니콜라스의 의자 다리를 툭 걷어찼다.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다시 가까워진 니콜라스가 눈을 흘겼다.



“다 했으면 가도 돼?”

“아니, 마지막.”



니콜라스가 손가락으로 문진표를 가린 채 의주를 빤히 쳐다봤다. 질문을 읽을 필요도 없었다. 허울뿐인 항목들은 눈을 감고도 외울 수 있었다.



“지금 제일 보고 싶은 사람.”

“없어.”

“진짜?”

“응.”



니콜라스의 입꼬리가 양옆으로 가늘게 늘어진다. 살짝 찌부러드는 콧잔등을 무심코 쳐다봤다. 무언가가 거슬릴 때마다 튀어나오는 일종의 버릇이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지어낼 수도 없지 않은가. 진실만 뱉어내는 혀끝이 달싹인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 씹어 삼켰다.



“이건 정답으로 해줄게.”



청색 문진표 위로 마지막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니콜라스가 정상 판정란에 서명을 휘갈겨 쓰고 종이를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주주는 정말 시시한 남자야. 너무 시시해서 재미가 요만큼도 없을 정도야. 입술이 비죽 튀어나온 니콜라스가 중얼거렸다.


반박할 마음은 없다. 이미 스스로가 재미 대가리 요만치도 없는 남자라는 걸 알고 있다. 니콜라스는 의주와 달리 좋아하는 것이 많았다. 입에 넣는 것부터 몸에 걸치는 것. 보고 듣는 모든 일에 나름의 까다로운 기준이 있었다. 기호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니콜라스는 망해버린 세상에서 가장 인간다운 존재일지도 몰랐다.



“주주.”

“왜.”

“사탕 있어?”

“네가 다 먹어놓고.”

“말고, 커피 맛.”



의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 커피 맛 싫어하잖아.”



잠깐의 정적. 찰나의 순간. 니콜라스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의주를 바라보다가도,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오늘부터 좋아할 거야.



“취향이 마음먹는 대로 바뀌어?”

“사람도 바뀌는데 취향이라고 못 바뀌어?”



별것 아니라는 투였다. 변의주 또한 별것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입맛은 원래도 시시각각 변하며, 배급품만 먹고 산 지 일 년이 넘어가면 없던 음식마저 그리워지는 법이다. 니콜라스처럼 변덕스러운 인간이 하루아침에 취향 하나를 바꾸는 건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병은 감각 그 자체를 앗아가기만 할 뿐,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만들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좋아해 보겠다는 사람 붙잡고 감염자 취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의주가 정상 판정란에 표시한 동그라미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채 마르지 않은 청색 잉크가 번지며 지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의주가 오늘 치 일정을 찬찬히 곱씹는다. 집에 가면 빨래도 해야 하고, 기름도 넣어야 되고.


대피소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가 요란한 잡음을 토해낸 건 그쯤이었다.



- 생존자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갈라진 음성이 건물 안을 울렸다. 배급을 받던 사람도, 침상에 누워 있던 사람도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던 방송은 짧은 침묵 끝에 모두가 가장 두려워하던 소식을 전한다.



- 동해 제4해상구역으로 향하는 최종 피난선의 출항 일정이 확정되었습니다.



니콜라스의 얼굴에 서려 있던 웃음기가 사라진다.

마지막 출항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육지의 대피소들이 차례로 폐쇄되면서 마지막 생존자들은 정화시설을 갖춘 동해 제4해상구역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한정된 의료 자원을 이유로 감염자는 피난선에 탈 수 없었다. 육지에 남는 순간 당장에 목숨이 끊어지는 건 아니었으나, 억제제와 식량 공급이 끊기므로 사실상 일종의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감염되지 않고 남아버린 사람들은 어떡합니까. 따지고 들어도 정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딜 가든 힘없는 자들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불합리한 세상의 이치였다.


대피소에 남은 억제제와 감염 기록의 원본을 운반하는 마지막 수송 임무는 제법 간단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그저 단순했고. 해상구역의 여석이 한 자리뿐이라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니콜라스를 태우면 되겠네요.”



변의주의 언어는 단조롭다. 감정이 섞이지 않고,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말투. 언제나 남는 것이 익숙한 사람의 태도. 니콜라스가 입술을 씹는다.



“그래. 그렇게 해, 그럼.”



니콜라스의 음성에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말과는 달리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곧장 반박이라도 할 기세로 입을 달싹거리다 말고 테이블 아래로 주먹만 꽉 말아쥔다.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이 눈에 밟혔다. 니콜라스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살 수 있는 자리를 양보해 주겠다는데. 고맙다는 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성질을 부릴 일은 아니지 않나.



“두 분이서 합의하신 겁니까?”



관리소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의주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니콜라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뇨.”

“방금 왕 대원께서 가신다고....”

“의주가 갈 거예요.”

“니콜.”

“뭐.”



날이 선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가 가겠다며 고개를 끄덕여놓고 이제 와서 또 무슨 심보인지. 의주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그새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잠이 부족할 때마다 으레 찾아오는 습관성 두통이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등록된 탑승 예정자는 왕이샹 대원입니다만 출항 전까지 변경 신청은 가능합니다. 최종 승선 명단은 항구에서 확정됩니다.”



관리소장은 두 사람의 사정 따위에는 요만치도 관심 없다는 얼굴로 서류를 넘겼다. 국가 재난 관리 본부 제17차 육상 인력 재배치 시행령. 사람 목숨을 반으로 가르는 문서 주제에 거룩한 척은. 최종 피난선은 이미 수용 인원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각 구역에서 몰려든 생존자와 연구 인력, 기술자, 군인들까지 태우고 나면 민간인에게 돌아갈 자리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이들을 위해 물자를 옮길 인력 또한 여전히 필요했다.


고작 한 장뿐인 수송 인력 특별 승선권. 두 사람이 화물을 싣고 항구까지 도착하면 둘 중 한 사람만 배에 오른다. 나머지 한 사람은 폐쇄 예정인 육지에 남아 잔여 물자를 정리한다. 국가는 그것을 희생이 아닌 잔류 인력 재배치라고 불렀다. 이름만 고쳐 붙이면 죽음도 업무가 되는 세상이었다.



“잔류 인력에게는 서부 방공호 삼 개월 이용권과 식량 배급표가 지급됩니다.”

“삼 개월 뒤에는요.”

“그 부분은 아직....”

“또 협의 중?”



니콜라스가 헛웃음 친다. 뭐, 협의만 기다리다가 죽으라는 거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제법 컸으나 관리소장은 못 들은 척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이곳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선택적인 난청은 기본 소양이다. 주홍색 인주가 묻은 원형 도장이 종이 위로 내리꽂혔다.



“명후일 오전 아홉 시 출발입니다.”



그 안에 제7보급소를 경유해서 임시 항구까지 도착하셔야 합니다. 비가 오면 우회하십시오. 북부 고가도로는 지난주에 무너졌고, 남쪽 터널은 현재까지 통행 가능합니다. 문장이 막힘없이 이어진다. 언뜻 소장은 입력된 대사를 줄줄 읊어내는 기계 같기도 했다.



“현재까지?”

“출발 이후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말일지도 몰랐다. 종말 이후 국민의 안전보다 책임의 소재를 먼저 챙기는 게 국가였다. 보호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 감염되면 개인의 부주의. 무너진 건물에 깔리면 경로를 잘못 고른 운전자의 과실. 괴한에게 물자를 빼앗기고 목숨을 잃어도 경계 의무 불이행. 행정 처리는 언제나 깔끔했다. 죽은 인간은 민원을 넣을 수 없다.


의주가 서류 하단에 이름을 적었다. 변의주. 석 자를 반듯하게 눌러쓴 뒤 펜을 니콜라스 쪽으로 밀었다. 니콜라스는 한참 동안 펜을 잡지 않았다. 비딱하게 앉은 채 변의주를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그저 따갑기만 했다.



“왜.”

“진짜 괜찮아?”

“둘 중 한 명은 남아야 되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왜 하필 너냐고. 금속으로 된 책상 다리가 니콜라스의 무릎에 부딪혔다. 요란한 마찰음에 관리소장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의주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누구는 남고 싶어서 남는 줄 알아. 니콜라스가 가는 편이 여러모로 합리적이었다. 변의주는 영어도, 중국어도 할 줄 몰랐다. 바다 위에 세워진 새로운 구역에서 사람들의 말을 옮기고 기록을 정리하는 일은 니콜라스가 훨씬 잘할 것이다. 니콜라스는 새로운 곳에서 여러 언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니까, 띄엄거리던 불어를 언젠가는 유창하게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변의주가 알고 있는 니콜라스는 살아남은 뒤에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존재. 피난선에 타면 창가 자리에 앉고 싶다는 소망부터, 해상구역에 도착한다면 바닷물부터 만져볼 거라던 소원. 언젠가 비가 그치면 몰디브에 가고 싶다던 소리를 기억한다. 니콜라스를 모르는 누군가는 세상 물정 모르는 꿈이라고 할지라도. 비 때문에 섬이 잠겨서 사라지면 어떡하지?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탓에 아이처럼 상기되어 있던 얼굴까지도 모두. 변의주는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그저 살아가는 것.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 먼 미래를 공상하기보다 지금 당장 주어진 일을 행하는 삶. 몇 번을 곱씹어 보아도 자신이 남는 선택이 옳았다. 명확한 계산이었다.



“나는 남아도 할 일 많아.”

“그거 다 끝나면?”

“그때 가서 생각할게.”

“아니?”


주주는 그때 가서도 생각 안 해. 니콜라스가 단번에 잘라 말한다. 의주의 손가락이 멎었다. 말에 뼈가 서려 있다. 대답 대신 테이블 위로 흩어진 서류의 모서리를 맞췄다. 한 번. 어긋난 종이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고 두 번. 종이 끝이 반듯하게 맞물릴 때까지 세 번. 괜한 손길이 이어졌다.



“화났지.”

“안 났어.”

“기분 나쁘잖아.”

“네가 잘못 본 거야.”

“변명도.”



니콜라스는 가끔 변의주보다 변의주를 잘 알았다. 한평생을 함께한 가족도 알아차리지 못한 시답잖은 버릇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감정을 억누를 때면 주먹을 말아쥐는 것. 기분이 더러우면 이미 맞춘 물건의 모서리를 거듭 정리하는 것. 생각이 많아지면 오른손 엄지로 검지 마디를 문지르는 것. 시답잖은 것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니콜라스가 가끔 성가셨다. 남들은 껌뻑 속아 넘어가는 표정을 니콜라스만은 믿어주지 않았다.



“니콜라스.”

“왜.”

“가서 서명해.”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니콜라스가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펜을 낚아채듯 집어 들고 서류 위로 이름을 갈겨쓴다. 길게 이어진 필체가 종이의 절반을 차지했다. 꼭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획이 비죽 튀어나왔다. 관리소장은 서류를 회수하고 작은 열쇠 꾸러미를 내밀었다. 지하 물자 창고와 수송 차량의 키였다.



“차량은 삼 번 출입구에 준비돼 있습니다. 적재 품목을 확인하시고 오늘 안으로 출발 준비를 마치세요. 그리고 두 분 중 누가 승선권을 사용할지는....”



말끝을 흐린 관리소장이 의주와 니콜라스를 번갈아 봤다. 괜히 눈치를 살피는 꼴이 퍽 우스웠다. 아무래도 본인 앞에서 살기 위한 드잡이질이라도 벌어질까 걱정하는 모양이다. 니콜라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귀 아픈 소리를 냈다. 걱정 마세요. 니콜라스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저희끼리 사이좋게 정할 수 있어요.”



그 말을 끝으로 회의실 문이 세차게 닫힌다. 얇은 벽이 짧게 떨렸다. 니콜라스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던 의주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정말 이상했다. 일전 먹지도 않던 커피 맛 사탕을 찾지를 않나. 조금 전에는 살 수 있는 자리를 주겠다는데도 화를 냈다. 아무래도 마지막 출항이라는 말에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관리소장이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저기, 왕 대원과는 원래....”

“자주 이래요.”

“많이 친하신가 봅니다.”

“... 아뇨.”



친한 친구 따위의 단순한 말로는 변의주와 니콜라스를 정의할 수 없다. 종말이 시작된 뒤 우연히 같은 구역에 배치된 사람. 여러 차례 한 차를 타고 오염지를 드나든 동료. 어쩌다가 입술을 맞댔고, 몇 번은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렇다고 해서 연인이라는 거창한 사이는 아니었고. 변의주는 니콜라스를 설명할 마땅한 표현을 알지 못한다. 의주에게 있어서 관계에 이름을 붙이는 건 늘 지나치게 어렵기만 했다.



-



지하 물자 창고는 한낮에도 밤처럼 어두웠다. 수명이 다한 형광등이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의주가 수송 목록을 한 손에 든 채 적재함을 확인했다. 억제제 열두 상자. 감염 경과 기록 원본 여섯 묶음. 증류수와 응급 처치 용품, 남은 식량 사흘 치. 물건을 하나씩 세어 차량에 옮길 때마다 목록 옆으로 작게 표시했다. 말이 좋아 억제제일 뿐, 그저 시간을 조금 비싸게 벌 수 있는 약이었다. 앰플 하나에 나흘. 운이 좋으면 닷새. 죽음을 고작 며칠 뒤로 미루는 물건에 사람들은 기꺼이 서로의 목을 졸랐다.


다섯 번째 상자를 밀어 넣을 때 즈음 창고 문이 열렸다. 니콜라스였다. 언제 성질을 부렸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제 몫의 짐을 들고 있었다. 분신처럼 지니고 다니는 수첩도 함께였다. 의주도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통역에 필요한 단어와 중요한 배급 일정 따위가 적혀 있다고 했다. 니콜라스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들을 시시콜콜 기록하는 버릇이 있다. 오늘의 기분이나, 기억하고 싶은 풍경, 아침부터 이어진 의주의 하품 횟수 같은 하찮은 것들.



“너 집 나왔어?”

“필요한 것만 챙긴 거야.”

“항구까지 이틀이면 가는데.”

“주주는 몰라. 필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



니콜라스가 어깨에 걸려있던 짐을 조수석 아래로 밀어 넣었다. 니콜라스는 유난히 쓸데없는 물건을 많이 가지고 다녔다. 당장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아도. 그런 점들이 오히려 니콜라스를 더욱 니콜라스답게 만든다는 걸, 넌 알고 있을까.



“그리고 이거.”



불쑥 내밀어진 손바닥 위에는 커피 사탕 하나가 놓여 있다.



“어디서 났어?”

“그냥, 방에 굴러다니던 거.”



니콜라스가 포장지를 한참 내려다본다. 갈색 비닐 위로 인쇄된 커피콩 그림을 엄지로 문질렀다. 뜯을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치고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먹어봐.”

“지금?”

“좋아한다며.”

“... 그러게.”



포장지가 바스락대는 소리를 내며 벗겨졌다. 니콜라스가 사탕을 입안에 넣었다. 니콜라스는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이 혀끝에만 올라와도 질색을 했다. 전에는 냄새만 맡아도 고개를 내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까 지금도 그럴 거라고. 곧바로 얼굴을 찌푸리거나, 혀를 내밀 줄 알았는데. 니콜라스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다. 단단한 사탕을 혀끝으로 한 바퀴 굴린 뒤 의주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때.”

“그냥 그래.”

“그게 뭐야.”

“오늘 처음 먹었으니까 아직은.”



니콜라스가 웃었다. 그제야 눈꼬리가 살짝 접혔다.



“몇 개 더 먹다 보면 좋아질 수도 있어.”



변의주는 더 묻지 않았다. 취향이라는 것은 본래 참으로 사소한 것이라서. 병이 퍼진 세상에서도 취향을 새롭게 정의할 권리는 남아있었기에. 적어도 의주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니콜라스가 혀 위에서 사탕을 굴렸다. 달그락. 이빨에 부딪히는 소리가 텅 빈 창고를 울렸다. 단맛이 나는지, 쓴맛이 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는.



“주주.”

“왜.”

“가는 동안 내가 운전할게.”

“장거리 운전 못한다며.”

“이번에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됐어. 내가 해.”

“또 네가?”

“차 키 줘.”



순순히 열쇠를 건네지 않는 얼굴에 고집이 서렸다. 입술이 꾹 다물리고, 키를 감춘 주먹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한동안 의주를 바라보기만 하던 니콜라스가 기침 같은 문장을 토해낸다.



“주주는 맨날 자기 혼자 다 하려고 해.”

“뭘.”

“운전도 네가 하고. 여기 남는 것도.”



안 좋은 것만 골라서 해, 항상. 별걸 다 따지고 들었다. 그저 투정이라고 생각했다. 의주가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열쇠 줘. 짤막한 재촉에도 니콜라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주주.”

“왜.”

“너도 살고 싶다고 말하면 안 돼?”



창고의 형광등이 두어 번 깜빡였다. 빛이 사라진 찰나에는 니콜라스의 얼굴도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다시 불이 들어오자 조금 전과 똑같은 표정이 나타났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얼굴. 눈가가 조금 발개진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가슴팍이 답답해졌다. 고작 이깟 질문 하나가 뭐라고. 목구멍이 턱 막혔다.

살고 싶은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죽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누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빼앗을 만큼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오늘 죽지 않았으니 내일을 살아가는 정도. 변의주의 삶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고.



“나는....”



입술은 열었으나 뒤에 따라 붙일 말이 없었다. 이내 니콜라스가 의주의 손바닥 위로 차 키를 떨어뜨렸다.



“됐어.”



니콜라스가 등을 돌린다.



“네 마음대로 해.”



손에 쥔 열쇠가 차갑다. 발을 구른 니콜라스가 신경질적으로 박스를 실어다 날랐다. 변의주에게는 니콜라스를 붙잡아야 할 이유도, 달래야 할 의무도 없다. 조금 전까지 낯짝 붉히며 싸운 것도 아니고. 니콜라스가 화났다는 이유만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언젠가는 알아서 풀릴 것이다. 언제고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는 알량한 명목 아래 상대방의 너른 아량을 기대하는 비겁함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도 있을 테지만. 변의주는 으레 기다리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밥을 먹고, 한 차를 타고, 입술을 맞대 보기도 한. 서로의 체온이 익숙해질 만큼 살을 붙이고도 그 모든 것에 명확한 이름 하나 붙이지 못한 사이. 친구도, 연인도 될 수 없는 애매한 무언가. 사랑의 언저리를 맴돌면서도 차마 그 안으로 발을 들이지는 못하는.


친하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한 것은 거짓이 아니다. 여전히 변의주와 니콜라스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선이라는 게 존재했다.



-



배급품을 옮기는 동안 니콜라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의 니콜라스였다면 내도록 엄살을 피웠을 텐데도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제 몫을 다했다. 무게가 실린 상자들이 적재함 구석으로 밀려들어 간다. 마지막으로 창고 문을 닫았다. 둔탁한 쇳소리가 지하 창고를 울렸다.


수송 차량이 대피소를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섰다. 회색 구름이 하늘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어제 내린 비가 도로 곳곳에 고였다. 빗물을 뒤집어쓴 자동차는 칠이 벗겨진 채 주저앉아 있었으며, 건물 외벽마다 검게 눌어붙은 얼룩이 길게 늘어졌다. 바닥에는 녹슨 간판과 깨진 유리 조각이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인간이 사라진 도시는 빠르게 인류를 잊어갔다. 아스팔트 사이로는 이름 모를 잡초가 돋아났다. 몸집을 불린 까마귀는 도로 위에 떨어진 살점을 두고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종말이란 실상 별게 아닐 수도 있다. 아무도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쌓이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건물이 무너지고. 그럼에도 계절은 돌아가고, 인간의 손길이 사라진 곳이 본래 제 모습을 찾아가고, 그저 짧았던 지구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


의주는 앞만 바라봤다. 조수석에 앉은 니콜라스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건 아닌 것 같았다. 차가 요철을 밟을 때마다 눈썹이 짧은 간격으로 꿈틀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이 달싹거리다가도 다시 굳게 다물리길 반복했다. 별수 없이 차 안을 메우는 건 엔진이 털털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늘 몸을 들썩이며 구닥다리 라디오를 매만지던 니콜라스. 좋아하는 노래를 지겹도록 반복해서 듣는 습관.


변의주는 언젠가 그 곡의 가사를 죄다 외웠다. 외우고 싶지 않았음에도, 익숙함은 의지의 영역이 아니다. 니콜라스가 부르는 노래는 멋대로 변의주의 귀를 파고들고, 뇌에 자리를 잡고, 종국에는 취향이라는 이름을 꿰찼다. 그러니까 변의주에게 취향이란 늘 그런 방식으로 생겨났던 걸지도 모른다. 제멋대로 인생을 파고든 니콜라스가 두고 간 것들. 변의주도 모르는 사이에 좋아하게 된 것들.


라디오를 켰다. 불규칙한 노이즈 사이로 끊어진 음악이 흘렀다. 내도록 니콜라스가 좋아한다고 우겼던 노래. 의주는 저도 모르게 가사를 따라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니콜라스는 눈조차 뜨지 않는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흥얼거리지도,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화가 단단히 났나 보다.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쉬웠다.


남부 터널에 도착한 건 대피소를 떠난 지 세 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입구 근처부터 버려진 차량이 듬성듬성 늘어서 있었다. 오래도록 손길이 닿지 않은 차체 위로 먼지가 내려앉았다. 터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도로를 점령한 차의 수는 많아졌다. 갈 곳을 잃은 인간들이 한꺼번에 차를 버리고 떠난 모양이었다. 의주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로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빛이 닿은 곳마다 검은 덩어리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버려진 옷가지인 줄 알았으나, 사람이었다. 하나같이 몸을 잔뜩 웅크린 사람들이 차와 차 사이에 널브러져 있었다. 빗물을 피해 터널로 들어온 감염자들. 가장자리에는 헤진 담요와 빈 생수병, 내용물을 핥아먹은 통조림 캔이 쌓여 있었다. 외부 대피소에서 거부당한 이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병의 끝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의주가 차를 멈춰 세웠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도로를 막은 사람들을 치워야 했다. ‘치운다’. 장애물을 한쪽으로 밀어내는 일에나 쓰이는 단어. 사람이 사람을 두고 사용하기에는 퍽 야박하고도 잔인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인간은 종종 물건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살아 있을 땐 물자를 소비하는 숫자가 되고, 죽었을 땐 통행을 막는 방해물이 된다. 인간의 존엄이란 배부르고 등 따스한 시절일 때나 찾을 수 있는 사치다.


방호복을 입은 의주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터널 안은 눅눅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아스팔트 위로 부딪히는 소리. 희미하게 남은 배설물 냄새와 썩은 천 냄새가 한데 뒤섞여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니콜라스도 말없이 의주의 뒤를 따랐다. 가장 가까이 누운 감염자는 이미 죽어 있었다. 무릎이 가슴팍까지 올라온 채 굳었고, 팔은 제 몸을 끌어안듯 안쪽으로 말렸다. 굽은 손가락에 눌려 손바닥에는 검게 마른 피가 엉겨 붙었다. 억지로 몸을 펴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수분을 모두 잃은 힘줄과 관절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모양이었던 것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몸이 마른 사람은 놀라울 만큼 가벼웠다. 살아온 날들과 품었던 마음, 좋아했던 사람과 간직했던 기억의 무게는 시체에 남지 않는다. 의주가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니콜라스가 뒤틀린 다리를 들어 올렸다. 뻣뻣한 몸 안에서 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둘은 감염자를 터널 가장자리로 옮겼다. 다시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 아직 미약한 숨이 붙어 있는 이도 있었다.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지 못한 채 눈동자만 느릿하게 굴렸다. 살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 마지막으로 무엇을 좋아했는지. 이제는 본인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니콜라스는 마지막 감염자를 내려놓은 뒤에도 한동안 허리를 펴지 않았다. 갈고리처럼 굽은 노인의 손을 바라본다. 손가락이 안으로 말려든 탓에 손톱이 살을 파먹고 있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좋아하는 음식을 집어 먹고, 아끼는 사람의 얼굴을 어루만졌을 그 손이. 이제는 제 몸 하나 온전히 펴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자신만을 움켜쥐고 있었다.


천천히 니콜라스가 제 손을 내려다본다.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편다. 한 번, 두 번. 마디들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오른손 검지가 왼손보다 조금 늦게 펴졌다. 니콜라스는 재차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오래 지켜보지는 않았다. 말기 환자를 눈앞에 두고 나면 멀쩡한 사람도 괜스레 손발을 움직여 보는 법이다. 가만 목이 마른 것 같고. 피부가 당기는 것 같고. 방금 나눈 대화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기 마련이다. 질병의 공포는 종종 질병보다도 빠르게 전염됐다. 니콜라스도 그런 것일 테다. 그저 겁을 먹었을 것이 분명했다.



-



몸을 많이 쓴 탓인지 터널을 빠져나온 뒤로 피로가 배로 몰려왔다. 눈꺼풀이 연신 아래로 추락했고, 초점은 자꾸만 어긋나길 반복했다. 밤새 누수를 막느라 잠을 설친 대가였다. 인간에게 주어진 체력에는 한계가 있다. 중앙선을 두 번째 밟았을 때는 니콜라스가 아예 운전대를 붙잡았다.



“갓길에 차 세워.”



이번만큼은 반박하지 않았다. 길 가장자리로 차를 붙인 의주가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십 분만. 시계를 보며 중얼거리자 니콜라스가 뭐라 대꾸한 것도 같았다. 한 시간은 자야 한다느니, 이러다가 피난선보다 저승에 먼저 도착한다느니. 눈꺼풀이 천 근이다. 니콜라스의 잔소리를 받아칠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의주가 눈을 감았다. 수면에 빠져드는 일은 순식간이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잠에 몸을 맡기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푹.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짤막한 죽음을 맛본 것처럼 감각이 끊겼다. 그런 의주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니콜라스의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꿈인 줄로만 알았다. 잠에 취한 탓에 정신이 아침에 있었던 일을 멋대로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커피보다 딸기라떼.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고, 응. 자주 듣는 노래는....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 종이 위를 더듬는 손가락. 입술 사이로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문장. 니콜라스가 작게 답을 외우고 있었다. 영어 단어를 암기하듯. 내일이면 시험을 치르는 학생처럼. 이미 수백 번은 대답했을 질문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고, 틀릴 때마다 처음부터 되짚어가며 자신의 선호를 외웠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니콜라스를 니콜라스로 구성하던 시시하고도 사소한 무언가들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의주의 눈이 뜨였다. 니콜라스는 수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 신경이 종이 위로 쏠린 탓에 의주가 깨어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장을 중얼거리는 입술이 동그랗게 옹송그려졌다. 아침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녹여 먹었던 커피 사탕의 이름이 붉은 볼펜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니콜.”



니콜라스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수첩이 급하게 덮였다. 무릎 위에 놓였던 볼펜이 바닥으로 떨어져 의자의 좁은 틈으로 굴러 들어갔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말하지 않았는지. 어디까지 잊어버렸는지. 제 이름은 기억하는지. 아침마다 뿌리던 향수의 냄새, 즐겨 듣던 노래, 멋대로 변의주의 취향까지 정해주던 그 모든 마음을 언제부터 잃었는지. 여러 개의 질문이 목구멍 안에서 엉키고 뭉쳤다.



“언제부터 이랬어.”



니콜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변의주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평소 같았으면 묻지 않았을 질문. 변의주의 눈썹이 구겨진 정도와, 입술을 깨문 횟수와, 접혀 들어간 손가락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정답을 찾아냈을 테니까. 그런 니콜라스가 조심스레 묻는다.



“주주, 화났어?”



가슴 한편이 내려앉았다. 니콜라스는 변의주보다 변의주를 잘 알았다. 남들은 무던하다고만 여긴 얼굴에서 뾰족한 감정을 찾아냈고, 괜찮다는 한 마디를 곧이곧대로 믿는 법이 없었다. 가끔은 그게 성가시기도 했다. 숨기고 싶은 마음까지 억지로 들춰내는 그게. 아닌 척하는 변의주의 등을 기어코 벽 밖으로 떠밀어댔으니까. 처음으로 니콜라스가 변의주의 감정을 물었다. 병이 앗아가는 것은 취향만이 아니다. 좋아하는 것에 묻어 있던 기억을 지우고, 그 기억과 이어진 감정을 갉아먹는다. 그렇다면 변의주의 침묵을 알아듣는 법도 니콜라스가 좋아하던 것들 중 하나였을까. 남들은 쉬이 해석할 수 없는 변의주의 언어. 둘 사이에서만 통용되던 암호. 니콜라스가 그것마저 잃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직접 말해야 했다. 니콜라스가 외울 수 있도록. 언젠가 잊어버리더라도 다시 알려줄 수 있도록.



“응.”



혀끝이 떨렸다.



“화났어.”



평생 얹혀있던 마음을 집어삼키는 법만 익혔던 것 치고,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놓는 일은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 도리어 목구멍을 틀어막던 무언가가 조금은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니콜라스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웃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어설픈 모양이었다.



“언제부터냐고, 니콜.”



재차 같은 질문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도망갈 틈을 주지 않았다. 사흘 전. 니콜라스가 그랬다. 사흘 전부터 기억이 흐려졌고, 혹시나 싶어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고. 말투는 가벼웠다. 고작 감기라도 걸린 사람처럼. 사흘이라는 시간을 입안에서 굴려본다. 사흘. 감염 사실을 알면서도 숨긴 시간. 아침마다 멀쩡한 사람 행세를 하며 문진표에 동그라미를 쳐온 시간. 그 짧은 사이에 니콜라스는 호오를 잃었다. 그러나 사흘이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항구에 도착하면 억제제가 있다. 바다 건너에는 연구시설도 있다. 피난선에 태울 수 없다면 몰래라도 숨기면 된다. 어떻게든 수를 찾으면 된다. 니콜라스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가슴이 답답했다.



-



비는 예고 없이 내렸다. 처음에는 앞 유리 위로 작은 방울 두어 개가 떨어지다 불과 몇 분 만에 하늘이 검게 내려앉았다. 오염도 측정기가 노란색으로 점멸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빛. 좁은 차 안으로 날카로운 경고음이 퍼졌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시야가 흐려진다. 와이퍼를 가장 빠르게 움직여도 도로의 형태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차량 표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요란했다. 산성 물질을 머금은 빗물이 오래된 도로를 때렸다.


의주가 핸들을 단단히 붙잡았다. 고작 몇 킬로미터만 더 가면 휴게소가 있었다. 하지만 낡은 필터가 폭우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계기판 위로 붉은 숫자가 쉴 새 없이 치솟았다. 마른침을 삼킨 의주가 주변을 훑었다. 도로변 어딘가에서 낡은 네온사인이 깜빡였다.


숙박. 정화수 완비. 오염우 대피 가능. 사랑을 나누던 장소가 목숨을 부지하는 대피소로 변하는 데에는 고작 일 년이면 충분했다. 세상이 망해도 모텔은 문을 닫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 있는 이상 영영 망하지 않을 사업 같기도 했다. 승합차가 급하게 주차장 안으로 파고들었다. 현관까지는 고작 십여 걸음. 방호복을 단단히 여민 채 빗속을 내달렸다. 빗물이 외피를 두드릴 때마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니콜라스가 의주의 뒤를 바짝 쫓았다.


주인은 카운터 안에 앉아 태연하게 라면을 먹고 있었다. 발전기 기름값과 정화 필터의 희소성을 근거로 배급표 여섯 장을 요구했다. 공무 수행증을 보여주자 마지못해 한 장을 깎아줬다. 멸망 직전까지도 공무원 할인은 제법 쓸모가 있었다. 온수가 나오는 방은 하나뿐이랬다. 침구를 오염시키면 배급표 두 장 추가. 정화수를 더 쓰면 한 장 추가. 세상이 망하면 돈도 쓸모없어질 거라고 누가 그랬던가. 화폐가 사라진 자리에는 배급표가 들어앉았다. 자본주의의 생명력은 바이러스보다도 질겼다.


삼 층 끄트머리에 위치한 방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벽지에 밴 담배 냄새와 몇 년은 묵은 듯한 락스 냄새가 풍기기는 했으나 침대 시트는 말라 있었다. 따뜻한 물도 나왔다.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문을 닫기가 무섭게 서로의 방호복 위로 중화제를 뿌렸다. 산성 오염물을 닦아내는 독한 약품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외피를 벗어 욕실 바닥에 밀어놓고,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는 곳을 정화수로 닦아내야 했다.


니콜라스의 손이 목뒤로 향하다가 멎었다. 작업복 지퍼를 쥔 손가락이 몇 번이고 미끄러졌다. 고작 손잡이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한다. 니콜라스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바꿨다. 오른손으로 실패한 일을 왼손으로 감추려는 우스운 모습에도 변의주는 웃지 못했다.


터널 안에서 내도록 쥐었다 펴던 손.

노인의 굽은 손가락.

조금 늦게 펴지던 니콜라스의 검지.


의주가 니콜라스의 손을 밀어내고 직접 지퍼를 내렸다. 축축하게 젖은 작업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방 안을 메운 히터 바람과는 어울리지 않게 니콜라스의 피부는 차가웠다. 정화수를 적신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 내리고, 어깨를 훑고, 굴곡진 등을 문질렀다. 익숙한 몸이었다. 불 꺼진 방에서 손끝으로 더듬은 적이 있고, 입술을 붙인 적도 많았다. 니콜라스의 살갗에 어떤 흉터가 있는지. 어디를 만지면 힘이 들어가고, 어느 곳을 건드리면 숨을 삼키는지. 관계의 이름은 붙이지 못하면서 몸에 관한 것만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이 알 수 있었다. 이건 니콜라스의 몸이 아니다. 견갑골 아래의 피부가 비정상적으로 팽팽했다. 수분을 빼앗긴 종이처럼 희게 일어나 있었고, 척추 양옆으로는 가느다란 힘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손바닥으로 쓸어내리자 니콜라스의 등이 짧게 떨렸다. 허리를 곧게 펴고 있어도 어깨는 미세하게 안쪽을 향해 굽어 있었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 펴봐.”



명령에 가까운 말이 흘러나왔다. 니콜라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의주가 직접 굽은 손가락을 펼쳤다. 힘을 주자 마디가 잘게 경련했다. 끝까지 펴지지 않는 검지. 피부 아래로 당겨진 힘줄. 조금 전 옮겼던 감염자의 손과 꼭 닮아 있었다. 진행 정도만 다를 뿐 도착할 모양은 같았다.


사흘? 고작 사흘 만에 몸이 이렇게 마를 리가 없다. 빗물을 많이 뒤집어쓸수록 병의 진행이 빨라진다고는 하나, 방호복을 늘 챙겨 입고 다닌다면 고작 몇 방울에 불과할 텐데. 초기 증상이 육체에 닿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좋아하던 것이 흐려진다. 다음에는 그와 이어진 기억이 사라진다. 손끝이 말리는 건 그보다도 나중. 이미 몸 안쪽까지 병이 스며들었다는 증거. 니콜라스가 내뱉은 사흘은 거짓말이다.



“사흘 아니잖아.”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분했다. 머릿속은 끓어오르는데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붙잡은 손목에 힘을 주었다. 뼈와 피부 사이에 남은 살이 지나치게 얇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말랐을까. 매일 얼굴을 보고도 몰랐다. 니콜라스가 작업복 소매를 길게 내리고 다녔는지, 식판에 담긴 음식을 얼마나 남겼는지. 향수를 뿌린 게 기분 전환이 아니라 사라지기 시작한 후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는지. 이제 와서야 의심할 수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생겨난다. 니콜라스를 보면서도, 니콜라스를 보지 못했다. 함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몰랐다. 변의주는 무능력한 인간이다. 긴 침묵 끝에 니콜라스가 입술을 열었다.



“열흘이야, 사실은.”



열흘이라는 날짜를 헤아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열흘 전, 서쪽 상가 구역으로 물자를 회수하러 갔던 날. 이미 절반쯤 무너진 건물에 들어갔다가 뒤늦게 천장이 주저앉았다. 떨어진 철골 아래에 몸이 깔렸고, 충격으로 안면 보호대에 금이 갔다. 하필이면 그때 비가 내렸다. 뚫린 천장 사이로 쏟아지던 검은 빗물과 깨진 보호대 틈으로 스며들던 습기도 생생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 안쪽이 따끔거렸다.


그리고 니콜라스. 의주의 몸 위로 무언가를 덮어씌우던 손. 깨진 보호대를 벗기고 멀쩡한 것을 씌워주던 니콜라스. 가까스로 철골 아래에서 빠져나온 뒤,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갛게 웃어 보이던 얼굴. 아니, 그때 그게 정말 땀이긴 했나?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나는 괜찮아. 주주야말로 피 나잖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어서.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 작업복 소매 끝에서 출처 모를 물이 줄줄 흘렀는데도. 추위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심하게 떨고 있었는데도. 본인은 외피 안쪽까지 젖어놓고 의주의 마스크부터 다시 확인하던 손길을 기억한다. 이제야 조각난 기억들이 하나의 답을 향해 달려간다. 니콜라스가 방호복을 벗었다. 깨진 보호대를 쓴 의주에게 제 것을 내주고, 맨몸이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비를 맞았다. 철골을 들어내는 동안. 구조 인력이 도착할 때까지. 변의주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던 그 모든 시간 동안.


오로지 변의주를 살리기 위해서.


변의주를 살린 대가로 니콜라스의 삶이 망가졌다. 구해진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 수지타산이라고는 맞지 않는 교환. 변의주는 그런 거래를 부탁한 적 없다. 네가 대신 죽으면서까지 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결과만이 남았다. 변의주는 살아 있고, 니콜라스는 말라간다.


문득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형벌처럼 느껴졌다. 가슴 언저리가 꽉 막혔다. 숨을 들이켰으나 폐부까지 닿지 않는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달음박질쳤다. 목구멍은 뜨겁고 손끝은 차가웠다. 화를 내고 싶은데.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방호복을 벗은 니콜라스에게? 그걸 받아 입고 살아남은 자신에게? 하필 그날 비를 뿌린 하늘에게? 또는 사람을 이딴 방식으로 죽이는 병에게?



“왜 그랬어.”



갈라진 음성이 튀어나왔다. 니콜라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의주가 다시 묻는다. 왜 그랬냐고. 왜 네 몫을 나한테 줬어?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왜 혼자 사라져가는 기억을 되짚고, 싫어하던 사탕을 먹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 앞에 앉아 있었어. 니콜라스에게 닿지 못한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소란스럽게 뒤엉켰다.



“... 후회 안 해?”



니콜라스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는다.



“응.”



담담한 대답이었다. 의주가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다본 니콜라스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온전히 펴지지 않는 손. 이미 자신의 의지를 배반하기 시작한 몸이었다. 그런 몸이 기어코 의주의 손목을 붙잡는다. 약해진 악력이 살갗 위로 얹혔다.



“후회 안 해.”



니콜라스가 다시 한번 그랬다. 비를 맞은 것도, 제 방호복을 벗어준 것도. 변의주 대신 병에 걸린 것도.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너를 살릴 거라고. 거창한 이유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도. 너라서 그랬다는 말도. 그래도 주주는 살았으니까.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는 표정을 하고서.


문득 니콜라스가 가여웠다. 상대방의 목숨을 제 것보다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무모함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타인을 살리겠다고 제 미래를 내던진 용기가. 니콜라스의 삶을 대신 살아가야만 하는 대상이 하필이면 변의주라는 사실이 못 견디게 애처로웠다. 차라리 후회한다고 말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고. 그날 너를 두고 혼자 빠져나왔어야 했다고 원망하고 저주하고, 구해준 목숨값을 평생에 걸쳐 갚으라고 했다면. 그랬다면 차라리 너를 대하는 일이 지금보다는 쉬웠을 텐데.


그러나 니콜라스는 변의주를 살린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살아남은 변의주를 다행이라고 여긴다. 이전까지 명확하기만 했던 계산들이 한순간에 쓸모를 잃었다. 옳고 그름이나 규칙과 절차도 상관없었다. 평생 주어진 명령에 순응하며 살아온 변의주의 안에서 처음으로 단 하나의 고집이 고개를 쳐들었다.


니콜라스를 살리고 싶다. 유난스러운 마음이 들끓는다. 주제도 모르고. 분수에도 맞지 않는 욕심을 부려서라도. 변의주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이미 사라진 감정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보다 하루를 더 살고, 그 하루의 끝에서 다시 다음 날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고작 며칠의 유예라고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죽음으로 향하는 속도를 늦추는 일과 멈추는 일의 차이를 따질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허리춤으로 손을 뻗는다. 오염지 외부 출입자에게 지급되는 비상용 억제제. 방호복이 찢어지거나 빗물에 노출됐을 때 본인에게 투여하라는 명목으로 주어진 앰플이다. 수송하는 물량과 달리 개인 지급품은 재고 확인을 거치지 않았다. 사용한 이후 보고서만 작성하면 그만이다. 죽지 않는다면 보고서쯤이야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투명한 보관함이 열리는 소리에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의주의 손에 들린 주사기를 알아보기가 무섭게 얼굴이 굳는다.



“안 돼.”



니콜라스가 손을 뻗었으나 의주는 가볍게 피했다. 이건 주주 거잖아. 앞으로 비 맞으면 어떡하려고. 남은 길도 길고, 차 필터도 낡았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니콜라스답지 않게 합리적인 말들이 줄줄 이어졌다. 자신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변의주의 내일을 걱정하는 꼴이 같잖았다. 의주가 주사기 끝에 맺힌 공기를 빼내며 침대 가까이 다가서자 니콜라스도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진짜 안 돼.”

“팔 줘.”

“싫어.”

“니콜.”

“너 감염되면 그때는 어떡할 건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문제다. 언제나 눈앞에 닥친 일을 먼저 처리하며 살아왔다.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당장 죽어가는 인간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가정에는 아무런 감흥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니콜라스가 터널에서 본 사람들처럼 몸을 웅크린 채 죽어가는 상상을 하면. 그런 상상을 하면. 생각만으로도 자꾸만 속이 울렁거려서.


변의주의 답은 정해져 있다.

니콜라스를 구하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니콜라스가 주사기를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의주는 뻗어오는 손목을 낚아채 그대로 침대 위로 밀었다. 갑작스러운 힘에 중심을 잃은 몸이 매트리스 위로 쓰러진다. 니콜라스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등을 비틀며 빠져나가려는 통에 낡은 침대가 요란하게 삐걱거렸다. 힘줄이 당기기 시작한 손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허벅지로 니콜라스의 다리를 누르고, 한 손으로 두 손목을 모아 붙잡았다. 거칠어진 숨이 좁은 틈에서 뒤섞인다. 니콜라스가 제 아래에 깔린 모양새에는 이미 익숙했으나 지금만큼은 어떠한 욕정도 들지 않았다. 발버둥 칠 때마다 드러나는 목과 앙상해진 쇄골만이 시야에 들어찼다.



“가만히 있어.”

“하지 마.”

“제발.”



저도 모르게 애원하는 음성이 튀어나온다. 니콜라스가 움직임을 멈췄다. 의주는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작업복 소매를 걷었다. 알코올 솜으로 팔뚝을 닦고 바늘을 밀어 넣는다. 투명한 약물이 천천히 몸 안으로 들어갔다. 니콜라스는 주삿바늘보다 의주의 얼굴을 오래 쳐다본다.


앰플이 완전히 비었다. 병을 되돌리기에는 지나치게 적고, 죽음을 유예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비싼 양. 의주가 바늘을 빼내고 솜으로 자리를 눌렀다. 니콜라스의 팔뚝 위로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 손가락으로 닦아내자 붉은 자국이 길게 번진다. 그제야 붙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니콜라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본 채 거칠어진 숨만 느릿하게 골랐다. 이내 약효가 퍼지기 시작한 듯 팽팽히 들어갔던 힘이 조금씩 풀렸다.


억제제는 손실된 감정이나 기억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몸속에 퍼진 오염원의 활동을 늦추고 수축으로 인한 고통을 줄일 뿐이다. 병을 낫게 하는 약이 아니라 죽음을 나흘가량 뒤로 미루는 약. 나흘이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러나 중요한 건 내일도 니콜라스가 살아 있다는 사실.


의주가 바닥에 떨어진 수건과 빈 주사기를 정리했다. 니콜라스의 옆에 누울 수도, 그렇다고 멀리 떨어질 수도 없어 침대 끝에 어정쩡하게 걸터앉았다. 폭우가 창문을 때린다. 바깥세상은 빗물에 푹 잠긴 것처럼 흐리다. 희뿌연 유리창 너머로 네온사인이 번지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니콜라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처음 잔 게 언제였지.”



쓰레기 봉투에 주사기를 밀어 넣던 의주의 손이 멎었다. 변의주는 기억한다. 몇 월 며칠이었는지까지 정확하게 짚어낼 자신은 없었으나 그날의 공기와 온도는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있다. 침대 왼쪽 스프링이 꺼져 있었고, 머리맡에 세워둔 비상등에서는 희멀건 불빛이 나왔다. 니콜라스가 목걸이를 풀지 않아 은색 체인이 쇄골 위에서 잘게 흔들렸다. 입술을 맞대는 내내 창밖으로 빗소리가 났다.


니콜라스가 먼저 입술을 맞붙였던 것도. 눈이 마주쳤고, 니콜라스가 조금 웃었으며, 이유를 물을 틈도 없이 입술이 닿았다. 그 뒤로는 모든 게 엉망이었다. 옷을 벗는 순서도. 손을 놓아야 할 곳도. 무엇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해 몇 번이나 어설프게 굴었다. 그럴 때마다 니콜라스가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변의주의 목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웃었다. 그 웃음이 좋아서 자꾸만 입을 맞췄다. 웃음을 멈추게 하고 싶으면서도, 어쩌면 조금은 더 듣고 싶어서. 모든 순간에 따라붙은 이유를 기억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넉 달 전.”



니콜라스가 눈을 감은 채 대답을 곱씹었다. 넉 달. 넉 달.... 낯선 숫자를 굴리듯 느린 음성이었다.



“생각은 나.”

“....”

“방이 되게 어두웠어. 주주가 계속 긴장했던 것도 기억나.”



니콜라스의 기억 속에도 장면은 남아 있었다. 다만 그날을 구성하던 감정만은 드문드문 도려내진 듯했다. 왜 변의주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는지. 제 허벅지 사이에 깔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얼굴을 보며 왜 웃음이 났는지. 다음 날 아침까지 곁에 남아 있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일어난 사건은 기억하면서도 그 사건을 선택한 마음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감정을 잃은 기억은 타인의 일기와 비슷했다. 자신이 쓴 글씨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 문장을 적던 당시의 마음만큼은 영원히 짐작할 수 없는 것. 니콜라스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약효가 돌기 시작한 손가락이 느릿하게 구부러졌다가 펴진다. 전보다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근데 왜 너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



담담한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의주는 아무렇지 않은 척 봉투의 입구를 묶었다. 비닐이 손안에서 구겨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상하지. 나 분명 주주만 보고 있었는데.”



니콜라스가 고개를 돌린다. 잠시 의주의 눈치를 살피던 니콜라스가 작게 물었다.



“몸은 기억하려나.”



무엇을. 묻지 않아도 뒷말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의주 좋아했던 거.”



가슴 안쪽이 서늘하게 식었다. 니콜라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힘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탓에 팔꿈치가 한 차례 꺾였다. 의주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받쳤다. 가까워진 얼굴. 익숙한 향수 냄새는 정화수와 약품 냄새에 묻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니콜라스의 시선이 의주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의미를 알아차린 의주가 먼저 몸을 물렸다.



“안 돼.”

“왜.”

“너 지금 제정신 아냐.”

“나 멀쩡해.”

“기억도 제대로 못 하면서 뭐가.”



니콜라스가 한동안 의주를 바라봤다. 상처를 입은 것 같기도 하고. 단순히 말뜻을 헤아리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예전 같았다면 입술이 조금 내려간 것만 보고도 변의주의 감정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제는 확신할 수 없다. 의주는 더 이상 니콜라스의 표정을 함부로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기억을 잃는 것과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고 니콜라스가 말했다. 본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의주가 누구인지도 안다고. 억제제를 맞았다는 것과 앞으로 항구로 가야 한다는 사실도 기억한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고. 니콜라스가 뱉어내는 언어들은 또렷했다. 눈빛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변의주는 움직이지 않는다. 니콜라스가 먼저 손을 뻗었다. 의주의 뺨에 닿은 손끝은 차가웠다. 전에 수없이 해본 것처럼 엄지로 광대뼈 아래를 쓸었다. 기억을 더듬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버릇처럼. 손은 망설이지 않고 의주의 목덜미를 감쌌다.



“주주.”



나지막한 목소리가 입술 가까이에서 흩어졌다. 궁금해서 그래, 나도. 숨결이 맞닿았다. 의주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물었다. 정말 괜찮은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지. 니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해. 재차 요구하자 이번에는 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다구. 그제야 입술을 맞댔다. 처음에는 확인하듯 가볍게. 언제라도 니콜라스가 밀어낼 수 있도록 어깨 위에 얹은 손에도 힘을 주지 않았다. 입술이 떨어지자 니콜라스가 미간을 좁혔다. 고작 이게 끝이냐고 묻는 표정. 다시 닿아오는 입술은 조금 전보다 적극적이었다. 목덜미를 감싼 손이 거리를 좁히고, 익숙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의주는 불현듯 니콜라스와의 처음을 떠올린다. 귀여운 니콜라스를 도저히 당해낼 방법이 없던 때. 웃통을 벗기자 드러난 몸은 생각보다 야했고, 심장은 꼭 터질 것처럼 뛰었고. 흥분감에 두 뺨이 한껏 상기되어 있던 니콜라스. 그때도 니콜라스는 시시하게 굴지 좀 말라며 성화를 냈었는데. 엉겁결에 시작한 관계에 변의주도 애를 많이 먹었다. 헛도는 손을 한참 고쳐 잡아야만 했다. 판판한 배에 입을 맞추면 살이 바르르 떨렸다. 고양이처럼 그르렁대던 목소리는 신기했고, 벌게진 눈가에 눈물까지 매달고서 저를 재촉하던 모습은 기꺼웠으며, 뒷목을 답싹 끌어안은 채 시야를 맞추던 니콜라스는 새삼스러웠다. 마음이 온통 날뛰는 감각에 니콜라스의 옆에서 잠을 청하던 그날은 새벽을 아예 꼴딱 샜다.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의주가 어떤 각도로 고개를 틀어야 서로의 코가 부딪히지 않는지. 어느 순간 숨을 들이쉬고, 언제 입술을 벌려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손은 자연스럽게 의주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고, 입술이 떨어질 때면 아쉽다는 듯 허리를 끌어당겼다.


변의주를 좋아했던 몸. 수없이 변의주를 끌어안은 몸. 감정이 지워진 자리에서도 오랫동안 밴 습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의주가 니콜라스를 침대 위로 천천히 눕혔다. 조금 전 강제로 누르던 때와는 달리 모든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손을 뻗기 전마다 눈을 맞췄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기 전에도 니콜라스의 반응을 살폈다. 손바닥으로 옆구리를 감싸기 전에도 니콜라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기는 어때. 니콜라스가 잠깐 눈을 감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분 좋아.”

“아프면 말해.”

“으응.”



니콜라스의 손이 제 어깨 위로 올라왔다. 변의주는 서두르지 않는다. 니콜라스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잠시 멈추고, 눈이 마주치면 다시 괜찮은지 물었다. 행동 하나에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니콜라스가 연신 의주를 재촉했다. 조금 더 만져도 된다고. 어떨 땐 자기가 먼저 의주의 손을 잡아끌기도 했다.



“왜 그래.”

“뭘.”

“주주 지금 내 눈치만 보잖아.”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니콜라스가 정말 이곳에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마른 어깨와 쉽게 가라앉는 호흡이 신경 쓰였다. 조금 전까지 제 아래에서 발버둥 치던 몸이 이제는 먼저 팔을 벌리고 있었다.



“불편하면 그만해도 돼.”

“알았어.”

“진짜.”

“알았다고.”



니콜라스가 짧게 혀를 찬다. 입을 맞추러 오라는 듯 손에 힘을 주었다. 느릿하게 니콜라스의 아랫입술을 깨문 의주가 천천히 살갗을 빨았다. 가까워진 몸 사이로 손을 뻗다 무심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자 니콜라스가 고개를 뒤로 확 빼낸다.



“아, 머리.”

“왜.”

“만지지 말라니까.”



의주가 손을 거뒀다. 니콜라스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대충 정리하고는 온통 불퉁한 표정을 짓는다. 짧은 정적. 니콜라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저도 모르게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건 질색하면서 다시 입술을 맞추러 오는 꼴이 어쩐지 익숙하다.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 니콜라스의 뺨을 감쌌다.



“이건 괜찮지.”

“응.”

“확실하게.”

“주주.”

“으응.”

“입 좀 다물어.”



착실하게 입을 다문 의주가 다시 입술을 맞붙인다. 어느 순간부터는 누가 먼저 다가왔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니콜라스가 의주를 부르면 의주는 빠짐없이 대답했다. 개중 몇 번은 서로의 말이 혓바닥 사이에서 뭉개졌다.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오래된 침대가 몸을 옮길 때마다 작은 소리를 냈다. 니콜라스가 지친 티를 내비치면 의주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 쉬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이 가까워졌다.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당장에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변의주는 당장에 눈앞에 있는 니콜라스가 가장 중요했기에. 열이 오른 뺨을 수 번이고 쓰다듬었다. 영원히 축축할 것만 같은 밤이 이어졌다.



-





니콜라스가 잠든 건 동이 트기 전이었다. 억제제의 부작용으로 일시적인 기면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를 떠올렸다. 누적된 피로까지 한꺼번에 밀려온 탓인지 품 안에 안긴 몸은 쉬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팍만 느릿하게 오르내렸다. 한동안 그 미약한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밤새 뒤엉킨 탓에 눅눅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다. 피부 아래로 불거진 뼈대가 전보다 선명했다. 바싹 마른 손가락은 잠든 와중에도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있었다. 의주가 굽은 마디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고 천천히 펼쳐냈다. 손끝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감염자는 제 몸을 끌어안는 모양새로 죽는다. 그 문장이 못내 싫었다. 그게 니콜라스의 미래를 설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땐 가슴이 섬찟했다. 사람의 죽음을 고작 한 줄짜리 증상으로 줄여놓은 연구 기록도. 니콜라스가 언젠가는 제 이름조차 잊은 채 혼자 몸을 말아야 한다는 정해진 결말도.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럼에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니콜라스의 숨을 확인하고, 손가락을 펴주고, 흐트러진 이불을 어깨 위까지 끌어올리는 게 전부였다. 변의주는 내도록 니콜라스를 놓지 않았다. 몸을 조금 뒤척인 니콜라스의 팔이 침대 바깥으로 흘러내렸다. 동시에 바닥으로 무언가 떨어진다. 낡은 가죽 수첩. 모서리가 조금 닳고 표면에는 빗물이 말라붙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의주는 수첩을 주워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두려다 손을 멈췄다. 벌어진 장 사이로 제 이름이 보였다.


변의주.


한 번도 아니었다. 페이지를 빼곡하게 메운 검은색 글씨 사이사이로 낯익은 이름이 반복됐다. 의주는 잠든 니콜라스를 돌아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뒤지는 취미는 없었으나, 이미 눈에 들어온 문장을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변명해 본다. 애초에 니콜라스가 허락 없이 의주의 인생을 뒤집어놓은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이깟 수첩 하나 정도는 봐도 되지 않을까. 비겁한 합리화를 끝낸 의주가 첫 장을 펼쳤다.


니콜라스의 글씨는 제멋대로였다. 영문과 한글, 번체자가 한 문장 안에 뒤섞였다. 급하게 적은 부분은 획이 이어져 본인 말고는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의주는 아예 수첩을 무릎 위에 올리고 한 장씩 넘겨본다.


의주는 집안일에 소질이 없다. 빨래도 잘 못하는 듯.

잠을 못 자면 오른쪽 눈부터 충혈된다.

기분이 안 좋을 때 엄지로 검지 마디를 문지른다.

의주는 생각보다 예민하다.

의주는 생각보다 고집이 세다.

변의주는 생각보다?

생각보다 다정하다. 그래서 좋아.


수첩을 넘기던 손끝이 멎었다. 고작 한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이토록 많은 문장이 필요했던가. 모두가 시시하다고 지나친 것들. 말하지 않아 아무도 몰랐고, 굳이 알아줄 필요도 없다고 여겼던 버릇들이 니콜라스의 언어로 남아 있었다.


남들에게 속을 들키지 않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무던한 척 입을 다물면 대부분은 정말 그런 사람이라고 믿어주었다. 원체 별생각 없는 인간. 주어진 일이라면 군말 없이 해내는, 속 편하고 다루기 쉬운 사람. 니콜라스는 변의주의 껍데기를 믿지 않았다. 의주가 입 안쪽 살을 씹을 때마다 불안하냐고 물었다. 대충 괜찮다고 둘러대도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니콜라스는 변의주를 읽었다. 정작 변의주 자신도 펼쳐본 적 없는 페이지까지 전부.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의주가 마른침을 삼키고 다음 장을 넘겼다. 날짜가 최근으로 올수록 문장은 달라졌다. 타인을 관찰하듯 적어둔 기록 사이로 니콜라스 자신에 대한 주의 사항이 늘어났다.



향수는 아직 좋아한다. 아마도!

비 오는 날은 원래 싫어했나?

의주가 좋아.

잊지 말 것.

반드시 기억할 것.

변의주를 잊어버리지 말 것.



마지막 두 문장 위로 제 이름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 있었다. 처음 한글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반듯하게 쓰다가, 뒤로 갈수록 획이 흐트러졌다. 어느 곳에는 중국어 발음까지 덧붙였고, 어느 곳에는 동그라미를 여러 겹 그려놓았다. 니콜라스가 적어둔 문장만이 니콜라스의 기억을 대신하고 있었다. 손에 들린 수첩이 무겁게 느껴진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손목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의주는 표지를 덮지 않는다. 끝까지 읽어야만 했다. 니콜라스가 잊어가는 것들을 이제라도 자신이 전부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수첩의 마지막 장에는 작은 종이 한 장이 반으로 접힌 채 끼워져 있었다. 탑승 예정자 변경 접수증. 기존 탑승 예정자란에는 왕이샹이, 그 아래 변경 탑승 예정자란에는 변의주가 적혀 있다. 아. 의주가 작게 탄식한다. 니콜라스는 처음부터 피난선에 탈 생각이 없었다. 회의실에서 성질을 부리며 나가자마자 단말기로 변경 신청을 넣은 게 분명했다. 그래 놓고 시치미를 뗐다. 얄팍한 거짓말로 변의주를 항구까지 데려갈 작정으로. 그걸 저만 몰랐다. 다시 변의주가 살아남을 길을 제멋대로 정했다. 비가 쏟아지던 날 제 방호복을 벗어 의주에게 입힌 그날처럼. 한 번 구한 목숨을 끝까지 책임지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손안에서 종이가 구겨졌다. 금방이라도 니콜라스를 흔들어 깨워 따지고 싶었다. 네가 뭔데 내 자리를 정해. 내가 언제 살고 싶다고 했어. 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나를 남겨두고 혼자 결정을 내리느냐고. 순간 접힌 확인서 뒤편으로 낯선 활자가 비친다. 의주가 종이를 완전히 펼쳤다. 탑승자 정보와는 상관없는 메모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북부 제3 고산관측소.



질병 발생 초기에 임시 치료 시설로 전환된 기상 관측소. 독립 발전기와 지하수 정화 설비, 소규모 억제제 합성 장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2차 수축기에 들어선 감염자의 진행을 장기간 멈춘 사례가 마지막으로 보고된 곳. 치료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손실된 기억과 감정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저 죽음이 더 이상 몸 안쪽으로 파고들지 않았다는 기록뿐이었다.



관측소와 연락이 끊긴 지 십삼 일.

시설의 가동 여부, 연구진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음.

통신 두절 이후 구조 인력 파견 계획 없음.



정부의 공식 분류는 폐쇄 추정 시설이었으나 확인된 폐쇄가 아니라 추정. 얼마든지 갈 수는 있다. 지도 위로 그려진 경로는 항구에서 북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도로가 온전히 남아 있다면 이틀. 무너진 구간을 우회하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관측소가 이미 빗물에 잠겨버렸을 수도 있었다. 독립 발전기는 멎었을 것이며, 살아남은 연구원이 있다고 해도 두 사람을 받아준다는 보장은 없다. 수십 가지의 실패가 기다리는 길이었다.


평소의 변의주라면 가지 않았을 길. 확실하지 않은 것에 목숨을 걸지 않고, 정해진 경로를 벗어나지 않으며, 가능성보다 안전한 결말을 택했을 과거의 저 자신. 불확실한 희망은 그저 위험이라고 믿었다. 누군가 정해준 선택지 안에서 가장 손해가 적은 답을 골라내는 일이 변의주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안전한 길의 끝에는 니콜라스가 없다. 피난선에 오르는 순간 변의주는 산다. 그 대신 니콜라스가 죽는다. 감염자를 태우지 않는 배는 물 위로 떠날 것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창 너머로 작아지는 육지를 바라보겠지. 니콜라스가 어느 곳에서 어떻게 말라가는지도 모른 채. 시간이 흐르면 죄책감은 무뎌지고, 바다 위의 삶에도 그럭저럭 적응할 것이다.


그러나, 니콜라스가 없는 곳에서 변의주는 무엇으로 남을 수 있을까.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는 인간. 멸망 전이나 이후나 바뀐 것 없이 하루를 때우듯 살아온 변변찮은 껍데기. 니콜라스를 만난 이후로 내일이 기다려졌다. 네가 웃을 때면 가슴께가 간지러웠고, 울상을 지으면 골려주고 싶었다. 네 반응은 신선하고 귀여워서. 미간을 찌푸리고 집중하는 모습은 깜찍했다. 입술을 내민 채 불퉁거리던 낯은 기꺼웠다. 니콜라스를 형용할 수 있는 단어는 많지 않다. 니콜라스는 그저 변의주를 조금 더 살고 싶게 만들어 주고. 이제는 네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고. 니콜라스가 묻어있지 않은 과거의 나날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제 안의 미세한 감정을 발견하고 이름 붙여주던 사람마저 사라진다면 변의주는 병에 걸리지 않고도 텅 비어버릴 텐데.


의주는 종이를 원래대로 접어 수첩 안에 넣었다. 흩어진 옷가지를 챙기고 남아 있는 약품을 가방에 담았다. 운전석까지 잠에 취한 니콜라스를 업고 가야 할지도 몰랐다. 항구에 도착한 다음에는 물자를 넘긴다. 감염 기록의 원본까지 의료팀에 인계한 뒤 수령 서명을 받는다. 그것까지가 변의주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 뒤로 이어지는 길은 누구의 명령도 아니다. 정해진 길이 없다면 직접 만들면 된다. 니콜라스가 그랬던 것처럼. 가이드라인 바깥으로 발을 내딛고, 확신할 수 없는 가능성에 목숨을 걸어본다. 피난선에는 타지 않는다. 니콜라스와 함께 북쪽으로 간다. 그곳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더라도, 기꺼이 희박한 확률을 건 도박을 향해서.



-



처음 억제제를 맞은 니콜라스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모텔을 나설 때도 반쯤 감긴 눈으로 의주의 등에 업혔다. 팔을 두른 채 얌전히 얼굴만 묻은 니콜라스의 숨결이 목에 닿았다. 차량 조수석에 눕히고 안전벨트를 채우는 동안에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니콜. 불러봐도 대답 없는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다 시동을 걸었다. 움푹 꺼진 아스팔트를 피할 때마다 차체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럴 때면 잠든 니콜라스의 머리가 창문에 부딪히지 않도록 한 손을 뻗어 막았다. 니콜라스의 몸은 자연스럽게 의주 쪽으로 기울었다. 방향을 바로잡아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어깨를 찾아왔다. 그런 순간들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니콜라스는 몇 시간을 내리 자면서도 이따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만다린과 영어가 뒤죽박죽 섞여 흘러나왔다. 한참 뒤 니콜라스가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눈동자가 차 안을 헤매다 의주에게 닿는다. 잠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얼굴로 한동안 의주를 바라보던 니콜라스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의주.”



운전대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별것 아니다. 부모에게 받아 평생 지겹도록 들은 두 글자. 관리소 직원도, 대피소 사람들도 모두 변의주를 변 대원 내지 의주 씨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니콜라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는 이상하리만치 낯설기만 해서. 니콜라스는 단 한 번도 변의주를 그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다.


글쎄, 언제부터였을까. 니콜라스가 지어준 별명이 익숙해지던 그게. 기분이 좋을 때도, 화가 났을 때도. 술에 취해 혀가 꼬였을 때마저도. 처음에는 듣기 싫다고 몇 번이나 정정해 주었다. 멀쩡한 이름을 두고서 왜 고집을 부리냐며 타박한 적도 있었다. 이제는 귀에 익어버린 목소리.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니콜라스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 니콜라스가 변의주를 정의하는 방식.


도로가 팬 탓에 차량이 크게 덜컹거렸다. 의주가 급히 한 손으로 니콜라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안전벨트에 몸이 걸린 니콜라스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왜 그렇게 불러.”



잠에 취한 니콜라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되는데.”



대답은 단순했으나 이상하게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알려주는 순간 니콜라스가 정말로 잊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아서. 제 이름보다 먼저 날아오던 애칭이 이제 니콜라스의 머릿속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아서. ... 아냐.



“나중에 말해줄게. 다시 자.”

“뭔 나중....”



말을 끝까지 잇지도 않은 니콜라스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항구까지 남은 시간과 연료를 계산하고, 해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빠질 수 있는 길을 머릿속에 그렸다. 임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싣고 온 억제제와 감염 기록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었다. 그것들을 챙겨 달아날 생각도 없었다. 할 일을 모두 끝낸 뒤에 떠날 것이다. 누구에게도 핑계를 주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에게조차 변명할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도로의 끝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 건 다음 날 새벽이었다. 임시 항구는 피난민과 군용 차량으로 뒤엉켜 있었다. 물 위로는 거대한 선체가 어둠을 가르며 정박해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매달린 마지막 세계. 출입구 앞에 늘어선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울고, 빌고, 소리치는 사람들 사이로 무장한 군인이 철책을 세웠다. 탑승권이 없는 사람은 선박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다.


수송 차량이라는 표시를 확인한 검문소가 길을 열었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깨우고 곧장 의료 물자 인계소로 향했다. 담당자는 봉인을 하나씩 확인하고 수령증 아래로 서명을 남겼다. 인계 완료. 두 단어가 찍힌 종이를 받아 들자 가슴 안쪽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맡은 일은 끝났다. 지금부터 변의주가 행하는 모든 일은 누구의 지시도, 의무도 아니다.



“차량은 언제 반출할 수 있을까요.”



의주의 질문에 담당자가 수령증 아래에 붙은 작은 바코드를 가리켰다. 검역 확인을 마치면 출입 허가가 갱신된다고 했다. 의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승선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외부에서 들어온 수송 인력은 모두 검역 대상입니다. 출입 기록을 말소하기 전까지는 차량을 반출할 수 없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입술을 짓씹은 의주가 수령증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였으나, 일차 문진만 무사히 마치면 될 것이다. 조심하면 된다. 그게 뭐든 간에.


니콜라스는 걷는 내내 의주의 소매가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붙잡았다. 대기 줄 끝에는 청색 문진표를 든 검사관이 앉아 있었다. 이름과 출신 대피소. 최근 비에 노출된 적이 있는지. 맛과 냄새를 구분할 수 있는지. 가장 좋아하는 음식과 노래. 니콜라스는 수첩에서 외운 답을 막힘없이 내놓았다. 규정된 질문은 모두 통과했다. 검사관이 마지막 칸에 펜을 대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문진표에서 니콜라스의 손으로 내려간다. 처음부터 줄곧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던 것이 패착이었다. 검사관이 조용히 물었다.



“오른손은 왜 안 쓰십니까.”

“다쳤어요.”

“언제요.”

“좀 됐는데.”

“실례 좀 하겠습니다. 손 좀 보여주세요.”



니콜라스가 주머니 밖으로 손을 빼내는 데에 필요 이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른 손가락 끝이 안쪽으로 굽어 있었다. 한 차례 진행되었던 수축은 손톱 아래에 검붉은 선을 남겼다. 짧은 전자음이 울린다. 뒤이어 검사대 상단의 경고등이 붉게 점멸했다.



- 감염 의심자 발생. 격리 절차를 시행합니다.



두 사람 사이로 방호복을 입은 인력이 들이닥쳤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팔을 붙잡았으나 여러 개의 손이 그보다 먼저 둘을 갈라놓았다. 물러나십시오. 감염자는 승선할 수 없습니다. 반복되는 경고가 귓전을 때렸다. 니콜라스의 마른 손가락이 의주의 소매를 놓치지 않으려 버텼음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끝은 허무하게 미끄러졌다.



“의주야!”



다급한 목소리가 인파를 뚫고 날아왔다. 발끝부터 난생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니콜라스!”



끌려가는 니콜라스 또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다. 의주를 향해 팔을 뻗으며 무어라 외쳤으나 방호 마스크와 뒤엉킨 소음 탓에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격리 구역의 철문이 닫혔다. 둔탁한 잠금음과 함께 니콜라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의주는 닫힌 문 앞에 멈춰 섰다. 알려주지 못했다. 니콜라스가 변의주를 뭐라고 불렀는지. 이제 와서는 제 이름보다도 그 두 글자가 더 변의주답게 느껴진다는 사실까지도.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니콜라스를 다시 데려오면 된다. 직접 알려주면 된다. 니콜라스가 잊어버릴 때마다. 의주는 닫힌 문 앞에 서서 짧게 숨을 골랐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화가 나고 두려울수록 순서를 지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짓을 벌일 것 같았다. 니콜라스의 말대로 모서리를 맞추듯. 하나씩. 정확하게.


물자 인계소로 돌아간 의주가 수령증을 내밀며 잔류 인력에게 지급되는 비상 억제제를 요청했다. 담당자는 탑승 명단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에게는 잔류 물자를 지급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명단에서 빼주세요.”



담당자가 의주를 올려다봤다.



“승선을 포기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의주는 대답 없이 특별 승선권을 단말기에 띄웠다. 승선권을 포기하면 잔류 인력으로 재분류되며, 그 순간부터 선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소멸한다는 안내가 이어졌다. 시스템은 친절하게도 세 번이나 같은 경고를 띄웠다.



승선 자격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사용 이후 복구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진행하시겠습니까.


의주가 확인 버튼을 눌렀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화면 위의 승선 가능 표시가 붉은 취소선으로 바뀌었다. 바다 위에서 살아갈 변의주의 자리가 사라졌다. 전산망 어딘가에서 숫자 하나가 줄어든다. 곧 다른 생존자의 이름이 그 빈칸을 채울 것이다. 변의주는 제가 내다 버린 미래를 후회하지 않았다.


잔류 인력에게 지급되는 것은 개인용 앰플 두 개와 사흘 치 식량뿐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의주가 화물 구역 안쪽을 바라본다. 폐쇄 대피소용 억제제가 철제 선반 위에 쌓여 있었다. 출고 일정은 미정. 수령 담당자 또한 지정되지 않은 물자였다. 의주는 가장 가까운 상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스물다섯 개의 앰플. 이변이 없는 한 니콜라스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백 일 남짓. 관측소까지 향하는 이틀을 무사히 넘긴 다음에야 나머지 시간을 계산할 수 있었다.


임시 격리실은 의료 화물 구역과 얇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었다. 본래 냉동 화물을 보관하던 곳을 급히 개조한 탓에 화물 이동 경로와 격리 동선이 한 건물 안에서 어설프게 뒤엉켜 있었다. 첫 번째 출입문 앞에서 의주가 멈췄다. 잔류 인력의 출입증으로는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붉은 불이 두 번 깜빡였다.


벽면의 대피 안내도를 확인한다. 임의로 증설된 격리 구역은 원래의 건물 구조와 맞지 않았다. 폐쇄된 통로와 아직 사용 중인 복도가 서로 다른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니콜라스가 있는 곳은 그리 멀지 않다. 고작 벽 하나. 곧장 비상 대피 통로로 방향을 튼 의주가 주저 없이 벽면에 설치된 차단기를 내렸다. 경고음과 함께 복도 전체가 어둠에 잠겼다. 비상 시 자동으로 열리도록 설계된 잠금장치가 일제히 풀리기가 무섭게 격리실 문을 열어젖혔다. 어둠 속 침상에 앉아 있던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니콜라스를 일으켜 세우고 어깨를 감싸 안은 채 계단으로 내달렸다. 뒤늦게 예비 전력이 들어오며 붉은 조명이 켜졌다. 멈추라는 고함이 따라붙었다. 의주가 계단 입구에 비치된 소화기를 낚아채 안전핀을 뽑았다. 새하얀 분말이 좁은 통로를 가득 메웠다. 기침과 욕설이 터지는 사이 철제 운반대를 밀어 계단 문을 막았다. 복도를 달리고, 난간을 뛰어넘고, 쌓인 화물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니콜라스가 휘청거릴 때마다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잡히면 끝이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머릿속.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그저 선명하기만 했다.


정부 표시가 붙은 수송 차량은 여전히 반출 대기 구역에 남아 있었다. 검역 확인란에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는다. 정상적인 절차로는 항구를 나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조수석에 밀어 넣고 운전석으로 뛰어들었다. 검문소 차단봉이 내려오기 전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체 옆으로 경고탄이 튀었다. 사이드미러 한쪽이 산산이 깨졌다. 바퀴가 연석을 타고 오르며 차량이 크게 기울었다가 곧장 중심을 되찾는다. 항구의 불빛이 빠르게 멀어졌다. 뒤따라오는 경보음도 이내 빗소리 너머로 사라졌다. 변의주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항구를 벗어난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니콜라스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약기운을 이겨내고 왜 그랬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지금 돌아가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기는 어차피 감염됐으며 의주까지 죽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종국에는 애원했다.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빌었다. 의주. 의주야, 제발. 왜 그랬어. 의주는 전방을 바라본 채 핸들을 붙들었다



“살리고 싶어서 그랬어.”



차 안이 금세 조용해진다. 내가 너를 살리고 싶어서 그랬어. 거창한 이유는 없다. 니콜라스가 저를 살린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이니 희생이니 하는 말로 포장하지 않아도 이미 답은 명확했다. 변의주가 직접 고른 선택지. 정해진 길을 벗어나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결말. 유일하게 포기할 수 없는 존재. 니콜라스가 죽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을 잊어버려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도. 숨을 쉬고 살아만 있다면 그땐 어떻게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니콜라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량은 북쪽을 향해 달렸다. 항구에서 멀어질수록 도로는 거칠어졌다. 가로등이 끊기고, 무너진 건물들이 창밖으로 길게 늘어섰다. 해가 떠오르고 있음에도 잿빛 구름에 가려 사방은 어두웠다. 어딘가에서는 다시 비가 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 비가 북부 관측소까지 집어삼켰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변의주는 달린다. 누군가 마련한 정답이 아니라 자신이 고른 오답이라면.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가볼 생각으로.


조수석의 니콜라스가 자꾸만 손을 주물렀다. 굽은 마디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차를 세우고 니콜라스의 손을 끌어와 검지를 눌러 폈다. 안으로 오므라들려는 힘줄이 손바닥 아래에서 뻣뻣하게 버텼다. 조금이라도 힘을 덜 주면 다시 말려들었다. 마치 죽음이 니콜라스의 손끝을 붙들고 당기는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었다. 화를 내고 싶었으나 정작 입을 열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괜찮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니콜라스가 의주의 굳은 얼굴을 살폈다.



“왜 그래?”



변의주를 읽는 법을 잊어버린 니콜라스에게. 의주가 직접 제 마음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면 이 감정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사라진다. 침묵이 길어졌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손가락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있잖아, 나는.



“무서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한평생 써본 적 없는 언어라도 되는 것처럼 발음이 어색했다.



“너를 잃어버릴까 봐.”



니콜라스의 눈이 천천히 커진다. 네가 죽으려고 한 건 화가 나. 나 살려놓고 너 혼자 남으려고 한 것도. 네가 나를 기억 못 하는 것도 다 화나. 한 번 입을 열자 그간 눌러놓았던 문장들이 엉망으로 쏟아졌다. 네가 죽는 게 싫다. 나를 두고 사라지는 것도 싫고, 혼자 멋대로 결정한 것도 전부 싫다. 내가 피난선에 타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거라고 생각한 네가 밉다. 그런 니콜라스를 진심으로 미워할 수도 없는 탓에 변의주는 더 괴로웠다.



“나한테 괜찮다고 하지 마.”



그제야 의주가 니콜라스의 눈을 바라본다.



“니콜, 나도 살고 싶어.”



잠깐 호흡을 고르고.



“근데 너랑 살고 싶어.”



변의주는 이제야 제 삶의 형태를 고른다. 니콜라스와 함께하는 삶이 좋다. 니콜라스가 없는 내일은 싫다. 세상을 이루는 수많은 기호 가운데 고작 두 개를 나누는 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니콜라스는 변의주의 취향 그 자체. 니콜라스가 고개를 숙였다. 의주에게 붙들린 손가락이 미약하게 움직였다. 잡아 오려는 듯하다가 힘이 모자라 포기한다. 의주는 그 손을 제 쪽으로 끌어와 아예 깍지를 꼈다. 한참 말이 없던 니콜라스가 물었다.



“... 아까 말 안 해줬잖아.”

“뭘.”

“내가 널 뭐라고 불렀는데?”



손바닥 안쪽에 식은땀이 뱄다.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이상하게 어려웠다. 니콜라스가 가장 자주 불렀던 이름. 듣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져 소중함조차 몰랐던 이름.



“주주.”



니콜라스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주주. 소리를 내지 않고 모양부터 익힌다. 잠시 뒤에는 들릴 만큼 작게 발음했다. 주주. 갓 배운 단어를 익히듯 혀 위에서 몇 번이나. 의주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왜 그렇게 불렀어?”

“몰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 마음대로.”

“의주는 싫어했어?”

“처음에는.”

“그럼 그 다음에는?”



의주가 짧게 숨을 들이킨다.



“조금 기다렸던 것 같아.”



니콜라스가 눈을 깜빡였다. 이해하려는 듯 의주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본다. 무언가를 떠올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얕게 웃은 니콜라스가 다시 이름을 불렀다.

“주주.”

“응, 니콜.”

“내가 주주 많이 좋아했어?”

“응.”

“확신하네?”

“난 다 기억하거든.”

니콜라스도 더는 묻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의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의주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팔이 저리고 목이 뻣뻣해져도 니콜라스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전방으로는 북쪽을 가리키는 낡은 표지판이 서 있었다. 비바람에 글자의 절반이 지워졌으나 방향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항구로 돌아가는 길은 이미 멀어졌다. 앞으로 얼마나 더 달려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마지막 장을 펼치자 자신을 탑승자로 바꿔놓은 확인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 또한 니콜라스가 변의주를 살리려고 애쓴 흔적일 터. 빈 페이지를 찾아 볼펜을 들었다. 무엇부터 적어야 할지 몰랐다. 니콜라스가 잃어버린 것들은 너무 많았고, 앞으로 잃어버릴 것은 그보다 더 많을 것이고, 고작 몇 장의 종이로 한 사람의 기억을 전부 붙들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주는 천천히 문장을 써 내려간다. 볼펜을 잡은 손이 자꾸만 떨렸다. 애써 힘을 주어도 글씨가 반듯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종이를 누르는 펜촉 아래로 깊은 골이 팼다. 뒤편까지 자국이 남을 만큼 같은 획을 눌러썼다.


괜찮다. 우리가 보낸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어도. 네가 잃어버린 기억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함께 떠올리며 시시덕거릴 추억이 남지 않아도. 변의주가 모두 기억하면 된다. 니콜라스가 잊어버릴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알려주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살아 줘, 니콜라스. 그래서 또 다른 기억을 쌓아. 아주 먼 훗날에 내가 너를 잊더라도, 네가 우리를 기억하는 차례가 돌아올 수 있을 만큼.


의주가 손을 모아쥐었다. 믿는 신은 없었다. 평생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본 적도 없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만큼은 붙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니콜라스가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마주 잡은 손에 힘이 실린다. 니콜라스가 나를 잊지 않게 해 주세요. 기도라기에는 염치없고, 소원이라기에는 참으로 지독한 문장들. 니콜라스가 나를 다시 사랑하게 해 주세요.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욕심을 몇 번이고 되새긴다.


잠든 니콜라스의 뺨을 쓸어내린 의주가 다시금 핸들을 쥔다. 달리는 길이 조금은 순탄하기를 빌면서. 사랑하는 니콜라스의 꿈자리가 사납지 않기를 빌면서.